임명룡 서울지사장

 

며칠 전 고향사람들끼리 정담을 나누는 SNS에 매화1리 국토유지관리 사무소 앞에 핀 홍매화 사진이 올려 진 것을 보았다. 예년에 비해 덜 추웠다지만 아직 1월 하순이라 한겨울인데 바알갛게 피어나는 매화를 보니 반가움에 마음은 벌써 봄을 맞고 있다.

나는 한때 매화가 너무 좋아 전국의 이름난 매화들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몇몇을 적어보자면, 순천 낙안읍성과 가까운 금둔사에는 엄동설한 납월(臘月)에 핀다는 납월매(臘月梅)가 있다. 예부터 동양에서는 음력 12월을 납월이라고 했는데, 실제로 납월매는 보통 2월 초순 즉 음력 12월 끝에 피고 있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설중홍매다.

홍매 하면 유명한 곳이 화엄사다. 홍매가 얼마나 붉은지 검은빛까지 띠고 있어 화엄사 홍매는 흑매(黑梅)로도 불린다. 화엄사와 가까운 쌍계사에서 불일폭포로 가는 사이 웅장하게 핀 백매(白梅)도 있는데 그 매화는 특별한 이름이 없지만 볼만하다.

경남 산청에는 산청삼매(山淸三梅)로 불리는 빼어난 매화가 셋이 있는데 첫째는 단성면 운리 탑동마을에 강회백이 심었다는 정당매(政堂梅)다. 고려 말에 강회백의 벼슬이 정당문학(政堂文學)과 대사헌이었기에 이 매화나무를 ‘정당매’라 부른다.

같은 단성면 남사마을에는 고려말 문신 하집(河楫)이 심었다는 원정매(元正梅)가 있다. 하집(河楫)은 고려말 공신으로 시호는 원정공(元正公)이다. 원정매가 있는 남사마을에서 지리산 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산천재가 나온다.

산천재에는 남명이 심은 남명매(南冥梅)가 있다. 남명이 “매화는 향기를 팔지 않는다”고 했던 그 매화다. 남명매는 암향(暗香)이 뛰어나기로 첫손에 꼽힌다. 또 양산 통도사의 홍매도 보고나면 오래 동안 여운이 남는 명매(明梅)다. 이밖에도 장성 백양사의 고불매(古佛梅), 담양 지실마을의 계당매(溪堂梅) 등이 이름났다.

한편, 위에 언급한 매화들은 고목에서 피는 꽃모양이나 빛깔 또는 향기로 유명세를 얻었지만 사연으로 명성이 생긴 매화도 있다. 산천재의 남명매나 퇴계의 분매(盆梅)가 그러한 예다. 그 중에 ‘의리(義理)’로 이름을 더한 월사매(月沙梅)도 있다. 월사매는 월사 이정구(李廷龜)의 호를 딴 매화다. 월사가 동지사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갔을 때, 북경 곤명원에서 구해왔던 단엽(單葉) 홍매다. 악록선인(萼錄仙人)이라는 별명까지 있으니 특별한 매화였던 것 같다.

조선 말 대쪽 같은 선비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이 월사매 가지를 어떻게 구해다 분매로 키워 지인들과 완상하는 것을 취미로 삼았다. 몰락한 소론 가문인 데다 양명학을 가학(家學)으로 이어온 까닭에 그는 항상 비주류였다. 소외된 선비들이 서강(西江)이 내려다보이는 영재의 글방에 모여 월사매를 감상했다. 황현(黃玹), 김택영(金澤榮), 강위(姜瑋), 여규형(呂圭亨) 등이다.

왕비가 왜인들에게 살해당하고 나라가 망해가는 와중에 왜(倭)를 등에 업고 개혁이니 개화니 하는 나라 판을 영재는 도저히 묵과할 수가 없었다. 벼슬을 버렸더니 왕이 가만두지 않았다. 벼슬이냐 유배냐를 놓고 그는 유배를 택했다. 전라도 보성으로 유배를 갔다가가 해배(解配)가 되자마자 그는 서강(西江)의 집을 처분하여 고향 강화도로 돌아갔다. 그새 마당에 옮겨졌던 월사매를 캐서 이삿짐 바리에 얹었다. 그리고 3년 뒤에 죽었다. 강화도 사기리 영재의 초막 명미당 마당에 옮겨놓은 월사매도 죽은 듯 말라갔다.

영재와 각별한 우정을 나누었던 매천 황현도 지리산 골짜기로 돌아갔다. 梅泉이란 호에서 알 수 있듯 매천 역시 매화를 몹시 애호했다. 1905년 영재의 동생 경재(耕齋) 이건승이 매천 형제에게 편지를 보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월사매가 주인이 죽은 지 7년 만에 꽃을 왕창 피웠다는 소식이었다. 조짐이 이상했다. 을사늑약으로 나라가 망하던 그해였다.

1910년 나라가 완전히 없어졌을 때 매천은 홀로 구례에서 강화도까지 걸어서 영재의 무덤 앞에 엎드린다. “죽어서 외롭다고 서러워 말 것이, 그대는 살아서도 혼자가 아니었던가”(無庸悲獨臥 在日己離群). 다시 지리산으로 돌아간 매천은 그 유명한 절명시를 남기고 자결한다. 경재는 만주로 갔고 매천의 동생 석전(石田) 황원은 1935년 지리산 저수지에 몸을 던져 자결한다. 경재가 작고하기 전까지 석전은 해마다 만주로 해태(海苔: 김)를 보냈다. 두 사람은 일생에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저작권자 © 울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