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명룡 서울지사장


 

왕양명(王陽明)의 전습록(傳習錄)에는 암중화(巖中花: 바위틈의 꽃)라는 일화가 있다.

양명이 남진에서 노닐 때, 한 친구가 바위틈에 피어 있는 꽃나무를 가리키며 물었다. “양명, 자네는 천하에 마음 밖에는 사물이 없다(心外無物)고 하는데, 저 꽃나무의 꽃은 자네나 내 마음과 아무런 관계없이 깊은 산속에서 저절로 피었다가 저절로 떨어지잖은가? 나의 마음과 저 꽃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이 말에 왕양명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자네가 아직 저 꽃을 보지 못하였을 때는 저 꽃이 자네의 마음과 함께 아무런 상관이 없는 정적의 상태에 돌아가 있었다. 자네가 저 꽃을 보았을 때 저 꽃의 색깔이 일시에 또렷해졌다. 이처럼 저 꽃이 자네의 마음 밖에 존재하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잖은가” 존재는 그렇게 서로의 인식 안에서 다양하게 펼쳐진다.

우리 국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詩) 중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김춘수의 <꽃> 역시 그러한 바탕에서 지어진 것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시의 내용처럼 우리는 그렇다. 누군가 자신의 존재를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은 사람이나 꽃이나 마찬가지다.

약 20여 년 전에 내게서 한문을 배웠던 동생 같은 제자가 멀리 캐나다로 이민을 가게 되었다. 같은 동네에 이웃해서 살다보니 그가 대학생이었을 때 한문 논문을 봐주면서 잠깐 맺은 인연이 스무 해가 되도록 이어졌다. 그도 얼추 마흔이 넘었고 형처럼 때로는 친구로 어울리며 잘 지내왔다. 또 독신으로 사는 술꾼이라 시도 때도 없이 어울리던 막역한 술친구이기도 했다. 둘이서 캠핑이며 여행이며 전국을 쏘다니기도 했다.

선생님이라 불리는 것이 어색해서 호칭을 형이라 해달라고 여러 번 부탁을 해봤지만, 그는 언제나 깍듯이 “선생님”이었다. 그런 동료가 막상 먼 나라로 떠난다고 하니 서운하기가 그지없다. 아쉬움에 연일 서로 불러내가며 잔을 기울인다.

지금 우리가 사는 마을에는 벚꽃 축제가 한창인데, 벚나무 아래서 술이 녹녹해진 그는 혀가 살짝 꼬부라진 소리로 그동안에 인연으로 맺어온 나를 극찬한다. 흐릿해진 눈으로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는데, 머릿속에는 남명(南冥)의 이 말이 생각났지만 차마 부끄러워 밖으로 꺼내지는 못했다.

남명(南冥) 조식(曺植)은 제자 김우옹(金宇顒)을 두고 이렇게 표현했다. “꽃밭이 봄 이슬에 젖어 있는데, 대나무 빗자루를 들고 꽃밭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바로 숙부(肅夫: 김우옹의 자)다.” 잘 알려졌다시피 조식(曺植)은 대쪽 같은 선비로, 사람에 대한 평가도 냉철하기 그지없다. 그런 분이 제자 김우옹을 두고 저런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칭찬을 받은 김우옹이나 그런 제자를 둔 남명 두 사람 모두 행운이다. 그 두 사람의 인연에 빗댈 수는 없지만 내게도 소중한 타인과의 인연이 있다는 생각에 행복해지는 밤이다.

지금 온 천지가 꽃들이 피고 지는 중이다. 이때다 싶어 어지간한 꽃들은 이 계절에 다 핀다. 펴서 어떤 꽃들은 사람들이 제대로 봐주기도 전에 혼자 지쳐 떨어지기도 한다. 꽃이야 그렇게 허무하게 져서 아쉽기도 하겠지만 보는 느낌은 사람마다 다른 것 같다.

예를 들면 목련은 활짝 폈을 때보다 꽃봉오리가 터지기 시작했을 때가 더 아름답고, 벚꽃 같은 경우는 만발했을 때보다 바람에 흩날리며 꽃비처럼 떨어질 때가 보기에 더 좋다고들 한다. 우리나라에서 큰 인기를 얻었던 일본 영화 <4월 이야기>도 첫 장면이 흩날리는 벚꽃으로 호응을 얻었다. 사람도 그렇게 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피고 지는 인상이 각각 다를 것이다. 나는 누구에게 어떻게 피고 지는 존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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