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명룡 서울지사장

 

내가 속해있는 어떤 모임에서 가족들과 함께 경주에 답사를 하기로 했다. ‘고리타분한 역사쟁이’로 불리는 내가 인솔자겸 해설자로 지목되었고, ‘여행’이란 단어가 그렇듯 말이 나오자마자 사람들은 들떠서 이런저런 제안들이 난무했다.

경주의 온갖 문화재와 명승고적이 오르내리고 마침내 한 사람의 입에서 성(性) 박물관도 가보자는 말까지 나왔다. 전국에서 제주도와 경주에만 있는 ‘어른들만의 뮤지엄!’에 가자는 소리에 다들 즐거운(?) 비명으로 호응했다. 그러면서 덧붙여진 조건에는 모두가 자지러지게 웃는 것이 아닌가. “고리타분한 임선생은 그 시간에 애들 데리고 놀고 계세요.”였다. 나는 겉으로 웃었지만 속으로는 비웃었다.

예나 지금이나 성인(成人; adult) 남자들이 모인 자리는 음담패설(淫談悖說)이 빠지지 않는다. 옛날 선비들이라고 해서 별다르지 않았다. 거기에는 성현(聖賢)들도 피해갈 수가 없었다. 대처하는 방식이 조금 달랐을 뿐이다.

유학(儒學)에서는 송나라 정호(程顥)와 정이(程頤)는 형제를 성리학(性理學)의 종주로 꼽고 있다. 두 사람의 호를 따서 정명도(程明道), 정이천(程伊川) 형제라고도 하고, 둘을 합쳐 이정자(二程子)라 일컫는다. 이 근엄한 대학자들이 하루는 잔칫집에 초대를 받고 갔다가 기생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형님인 명도(明道) 선생은 기생이 옆에 앉아서 술을 따르고 시중을 드는 것을 기꺼이 받으며 즐겁게 잔치를 즐겼지만, 동생 이천(伊川) 선생은 그런 형님을 못 마땅히 여기며 기생을 멀리하고 혼자 식사를 마치고 자리를 떴다.

이튿날 이천(伊川) 선생이 형님께 따져 물었다. “형님 같은 큰 도학자께서 어찌하여 기생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춤을 추는 추태를 보이십니까.” 그러자 명도(明道) 선생이 대답했다. “나는 그 기생을 어젯밤 그 자리에 두고 왔는데, 오늘 그 기생은 너의 마음에 앉아있구나.” 음담(淫談)이든 음사(淫事)든 그 자리에서 웃고 즐겼으면 그만이지 이튿날까지 마음에 담고 있는 네가 도리어 문제라는 것이다. 또, 정인홍(鄭仁弘)이 쓴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의 남명집(南冥集) 발문(跋文)을 보면, 퇴계 이황 선생은 음담패설을 들으면 귀를 씻었다는 말이 나온다. 귀를 씻듯 마음에서 털어버리면 그만인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음담(淫談)이 어찌나 진지한지 도무지 속(俗)과 성(聖)의 경계(境界)를 가늠키 어렵게 하는 도학자도 있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선생의 글에서 발견된다. 다산 선생께서 진도에 유배 중일 때 따르던 제자들이 많았다. 그 가운데 관아의 비장(裨將)의 직책을 맡아 떠나게 된 황(鐄)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다산은 그에서 사제(舍弟)의 예를 갖추어 일종의 지침서를 써서 주었다. 비록 아전이라고는 하나 항상 자부심을 지니라는 당부를 시작으로 지켜야할 세목을 정리하였는데, 그 중에 ‘관기(官妓)’ 즉 관아에 속한 기생을 고르는 방법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대충 요약을 하면, “기생들을 멀리하여 중(僧)이나 고자(鼓子) 소리를 듣고 사는 게 좋겠지만, 그러기는 힘들 테니 기생을 고르되 절대로 예쁘고 야한 여자를 먼저 선택하지는 말라”는 충고였다.

그런데 그 디테일한 묘사에는 요즘 시대에도 차마 입에 올리기 어려운 용어들이 등장한다. 그럼에도 너무나 진지한 경계서(警戒書)로 작성된 까닭에 분명 음담(淫談)임에도 음담패설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내공(內功)이 쌓인 진정한 고수(高手)들만이 가능한 서술방법일 것이다.

어느 시대나 사람들의 사회는 성(聖)과 속(俗)의 경계를 넘나들기 마련이다. 그 엄격하다는 서양의 중세(Mittelalter), 부르고뉴 공국(公國) 대담공 샤를(Charle)은 자신이 소유한 위락정원에 여러 기계장치들을 설치하였는데, “여자들이 그 밑을 지나가면 흥분하여 사타구니가 젖게 되는 기계”도 있었다. 그깟 성(性) 박물관 정도에 비할 바가 아니잖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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