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상칼럼 - 초가삼간의 행복 11

 

아이가 걸음을 배워 우리라는 공동체로 첫 발을 내딛는 공식적인 행사가 돌이며, 돌잔치가 벌어지는 마당은 동네 사람들과 첫 안면을 트는 곳이다.

한국인이 가지는 ‘우리’ 라는 개념은 마당에서부터 싹튼다. 이번에는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우리의 의미를 살펴보려 한다.
한국인들은 자기(自己) 를 ‘저’, ‘나 (내)’, ‘우리’ 등으로 표현한다. 주장이나 감정을 낮추고 들어내지 않을 때 ‘저’라고 하며, 자기를 분명히 하고 확실하게 나타낼 때는 ‘나’ 라고 한다.

반면 ‘우리’는 ‘남 (상대)’ 이 없으면, ‘나’ 역시 존재 할 수 없다는 상의상관의 관계 속에서 나타나고 유지되고 있는 다양한 ‘나’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생물학적으로는 아버지가 아들을 낳지만, 아들이 없으면 아버지도 없으니, 아들이 아버지를 낳고, 아버지가 아들은 낳는다는 동시적 존재논리가 성립된다.

관계를 중요시 하는 한국인들은 ‘나’를 ‘우리’ 로서 나타낸다. 항공대학교 최봉영 교수의 「한국인에게 나는 누구인가」 라는 저서 말미에 2008년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개원 50주년기념 학회’ 에서 이어령 선생과 ‘우리’ 에 대해서 벌인 살벌한 논쟁이 실려 있다.
이어령은 “나는 우리가 싫다” 를 전제로 우리는 한자 문화권에 속해 있다. 그래서 한자와 같은 의미로 ‘우리 학교가 아니라 내 학교’ 라고 해야 한다. 영어도 이러한 구조로 되어 있다. 한국인의 언어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최봉영은 비록 같은 문자라 할지라도 민족의 정서에 따라 다르게 이해된다. 따라서 “한국인은 ‘나’ 와 ‘남’ 이 ‘우리’ 로서 함께 어우러지는 반면, 중국인은 남을 나와 같은 것으로 만들어서 나의 영역을 넓혀나가려고 한다.” 며,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는 나의 영역을 세상 끝까지 넓혀 나가려는 중국인의 욕망을 담고 있다고 반박했다.

이 논쟁을 계기로 이화여대 정대현 교수의 <‘우리 마누라’ 의 문법>, 서울대 강진호 교수의 <‘우리 마누라’의 의미> 라는 논문이 발표되었고 이어령의 주장은 설득력을 잃었다.

이어령의 문화인식 바탕에는 한국문화는 중국, 일본, 서구 등에 비해 열등하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그래서 “어떻게 (무지하게) (내) 마누라를 우리로 공유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것은 이어령이 앞서 말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처럼 마누라는 남편과 동시적 존재로서 화자의 입장에서 ‘우리 마누라’는 ‘나와 분리해서 따로 존재 할 수 없는 대상’ 이라는 사실을 모르거나 부정하고 있음을 말한다. 뿐만 아니라 ‘나의 마누라’가 혈연, 지연, 장소 등에 따라 ‘엄마’ ‘언니’ ‘딸’ ‘며느리’ ‘사장님’ ‘선생님’ 등 헤아릴 수 없는 수 많은 우리로서 나타난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있다.

한국인의 우리라는 말 속에는 ‘세상은 홀로 존재할 수 없으며, 나는 상대에 따라 다양한 우리로서 나타난다.’ 는 심오한 철학이 담겨져 있다. 그런데 왜 이어령은! 서구중심의 철학과 사상을 신봉하는 수많은 지식인들은…,… 우리라는 개념을 부정하려들까! 그들로부터 교육을 받은 우리들은 의문의 1패, 100패를 당하고 있지 않을까! 아래 인디언들의 사례로 현재 우리문화에 대한 인식과 수준을 가늠해보며 다음호에 이야기를 이어 갈까 한다.

인디언들을 송두리째 짓밟은 백인들! 자신들의 우월성을 보여주겠다며, 몇 남지 않은 인디언 추장들을 도시로 초대했다. 무엇을 보여주어도 시큰둥 하는 인디언들을 박물관과 미술관으로 데리고 가서 예술과 철학을 운운하면서 침이 마르도록 유식을 떨었다. 보다 못한 나이든 추장의 일갈, “오호! 백인들의 철학은 참으로 요상하군요, 수 백 년 동안 당당히 서있던 웅장한 나무들을 베어내고, 대지의 깊은 곳까지 찢어발긴 탓에 은백색의 물줄기들이 말라버렸어요. 신이 창조한 불후의 명작을 이처럼 무자비하게 망가뜨리고서는 납작한 표면에 색을 조잡하게 칠해 놓고 걸작이라고 자화자찬 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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