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농작가 배동분의 산골이야기

 

작년 어느 여름날, 집 근처에 아기 맷돼지 한 마리가 내려왔다가 우리 부부가 나타나면 사라지는 거였다. 맷돼지는 어미가 새끼들을 꼭 데리고 다니지 새끼 혼자 다니는 것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의아했다. 아기 맷돼지의 덩치가 얼마나 작고 귀여운지 처음에는 작은 강아지인가 착각할 정도였다.

아기 맷돼지를 발견하고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어미는 나타나지 않고 아기 맷돼지만 사람을 보고 도망갔다. 그렇게 몇 번 목격을 하고 나서 사태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왜 혼자 내려왔을까? 왜 꼭 저 장소에서 발견될까? 알고 보니 야콘즙을 짜고 나서 그 찌꺼기를 나무 아래 거름으로 주었는데, 그것을 먹고 가는 거였다. 달달한 야콘이 맛있었나 보다. 그는 늘 혼자 왔다가 혼밥(?)을 하고 갔다.

손에 잡힐 듯이 가까운 거리에서 야콘을 먹어도 안스러워 먼 발치에서 지켜보기만 했다. 그렇게 한참 시간이 흘렀고, 아기 맷돼지가 먹을 야콘도 바닥이 났다. 그때부터 우리 부부는 아기 맷돼지가 먹을 것을 그 자리에 갖다 주기 시작했다. 옥수수, 감자도 주고, 붉은 속을 많이 붙여서 수박 등을 갖다 주곤 했는데, 다른 것보다 수박을 좋아했다.

특히 우리집 귀농 주동자가 나서서 아기 맷돼지를 챙기기 시작했다. 인기척이 없을 때 주로 나타났지만 우리가 발견할 때마다 녀석은 몸에 살이 조금씩 붙기 시작했다. 귀농 주동자가 얼마나 걷우어 먹였는지, 처음 발견시보다 덩치가 조금씩 커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가을이 되어 갈 즈음부터는 녀석을 발견할 수 없었다. 서운한 마음도 있었지만 어미를 찾아갔나보다 하고 잊고 살았다. 그런데 사단이 난 건 바로 그때였다. 고추를 따러 가보니 이게 웬걸 고추가 주렁주렁 열린 고추대를 다 뽑아 놓았다. 얼마나 뽑아 재꼈는지... 발자국이나 파놓은 구덩이를 보아 우리가 걷어먹인 꼬맹이 맷돼지가 맞다는 판단을 했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이번에는 주렁주렁 달린 야콘을 다 뽑아 놓았다. 야콘의 키가 워낙 커서 가운데에 그 많은 야콘을 뽑아 놓고 먹었는지 알지 못했다. 물론 주위에 그물망을 다 둘러쳐서 노루는 확실히 차단되었지만, 맷돼지는 주둥이로 망을 걷고 들어오기 때문에 방도가 없었다.

하루하루 뽑아놓는 평수가 늘어만 갔다. 밤에 괭과리도 쳐보고, 자다 일어나 밭에다 대고 소리도 질러보고, 밤새 시끄러운 음악도 틀어놓아 보았지만 허사였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구나’ 소리가 옹아리처럼 튀어나왔다.
“아기 맷돼지야, 어떻게 니가 이럴 수 있니? 집도 절도 없이 다닐 때 우리가 걷우어줬건만...”그런데 차를 타고 가는 깨밭골 야콘밭도 사단이 난건 마찬가지였다. 약 3천 평 정도의 밭에 유기농으로 야콘을 심었고, 그 밭 역시 2천 평 정도를 쓰나미처럼 맷돼지가 휩쓸고 갔다. 먹기도 했지만 뽑아재껴 놓은 것이 많아 피해는 점점 커졌다.

그 밭 역시 노루든, 맷돼지든 4발 달린 짐승 발이 망에 닿기만 하면, 여러 가닥의 그물로 인해 뼈도 못추린다는 ‘특수 그물’을 전 밭에 둘러 쳤지만 맷돼지만큼은 무용지물이었다. 그러던 한 날 서울에서 온 지인들과 야콘 수확을 하고 깨밭골 야콘밭을 나서는 순간, 어둠 속에 정통으로 가로 막고 우굴우굴 서있는 물체가 보였다.

세상에나 11마리나 되는 맷돼지떼가 아닌가!! 집으로 가는 차안이었는데도 몸에 난 솜털이란 솜털까지 일제히 풀처럼 곤두설 것만 같았다. 녀석들은 우리를 인식하고 유유히 산으로 사라졌다. 그때 알았다. 내가 우리 집에 나타나는 그 어린 맷돼지가 농사를 망친 것은 애교였다는 것을... 개체수가 저 정도인데 무슨 할 말이 있는지...

이제 눈내리는 겨울이 되었으니, 그 화상들을 볼 일이 없는 줄 알았다. 하지만 간이 커져서 등발이 좋은 녀석 4~5마리가 팀플레이로 집 주위를 아작내고 다닌다. 집 앞 꽃밭까지 와서 지렁이를 캐먹고 가고, 내년 봄에 캐려고 남겨둔 돼지감자를 매일 와서 먹고 간다.
이 겨울에도 우리 부부는 현관 밖으로 나갈 때, 괭과리를 치고 나간다. 내년 농사 걱정은 둘째 치고 지금 당장 코 앞에 자주 활개치고 다니는 맷돼지 무리가 뒷골 땡기게 한다.
 

 

저작권자 © 울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