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명룡 서울지사장

 

유명 프랜차이즈 영어학원이 한때 내건 광고 문구는 “이제부터 영어로 꿈을 꾼다” 였다. 꿈속에서 영어로 대화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잘하게 된다는 뜻이었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영어에 대한 스트레스가 얼마나 심하면 꿈에서도 영어를 할까싶기도 했다. 후자의 의미가 강했던지 그 카피는 금세 사라졌다.

논어(論語)에서 사람들이 좋아하는 문장 중에 “知之者不如好之者(지지자불여호지자), 好之者不如樂之者(호지자불여락지자)”라는 구절이 있다. 풀이하면 “그것을 아는 사람은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 인데, 해석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대체로 어떤 대상과의 관계에서 개인의 감각적 체험 만족도를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는 의미로 새긴다.

첫째는 알아서 분별할 수 있는 단계(知之)이고, 다음은 좋아하게 되는 단계(好知), 그 다음이 즐기는 단계(樂之)라는 것이다. 덧붙이면 단계마다 각각의 영역이 있고 순차대로 체험을 해야 제대로 알게 되며, 궁극의 이해는 그 대상과 정서적으로 공감하여 편안하게 되는 경지, 즉 ‘즐김’이라는 것이다. 현대 중국의 석학 이택후(李澤厚)는 논어의 이 구절을 극찬하면서 “즐거움이야말로 본체에 대한 깨달음이며, 깨달음이 ‘즐거움’이 되는 것이 중화문화의 특징이다”라고 했다. 다음 소개할 고려시대 문장가 이규보의 <꿈속에서 시를 잇다> 라는 글에는 그러한 궁극의 경지를 볼 수 있는 장면이 있어서 재미있다.

을해년 삼월 어느 날 꿈에, 깊은 산으로 들어갔다가 길을 잃고 어느 동굴 안 누대(樓臺)에 이르렀다. 누대는 치장이 화려하고 빛나서 예사롭지 않았다. 그래서 옆 사람에게 “이곳이 어디요?” 하고 묻자, “선녀대요.”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갑자기 예닐곱 명의 미녀들이 문을 열고 나와서 나를 맞아들여 간곡히 시(詩)를 청하였다. 이에 나는 시를 읊기 시작했다. “路入玉臺呀碧戶(로입옥대하벽호) 길을 따라 옥대에 들어오니 푸른 하늘 궁전인데/ 翠娥仙女出相迎(취아선녀출상영) 푸른 눈썹 선녀들이 서로 반겨 맞이하네” 하고 읊었건만, 어쩐지 여인들은 몹시 불만스럽게 여겼다.

나는 까닭을 몰랐으나 즉시 시를 고쳐 읊기를, “明眸皓齒笑相迎(명모호치소상영) 맑은 눈에 이 하얀 미녀들이 웃으면서 맞이하니/ 始識仙娥亦世情(시식선아역세정) 선녀들도 인간과 성정이 통함을 알겠노라” 하였더니 여인들은 다음 구(句)를 청하였다. 내가 여인들에게 양보하자 한 미녀가 뒤를 이어 읊기를, “不是世情能到我(부시세정능도아) 인간의 정이 우리에게 통해서가 아니라/ 爲憐才子異於常(위련재자이어상) 그대가 뛰어난 재사이기 때문이라오” 하였다.

그런데 운자가 틀렸기에 나는 “신선도 운(韻)이 틀리십니까?” 하고는 박장대소를 하는 바람에 꿈에서 깼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이었다. “明眸皓齒笑相迎(명모호치소상영) 맑은 눈에 이 하얀 미녀들이 웃으면서 맞이하니/ 始識仙娥亦世情(시식선아역세정) 선녀들도 인간과 정이 통함을 알겠노라/ 一句才成驚破夢(일구재성경파몽) 한 구절 읊고 꿈에서 깨어난 것은/ 故留餘債約尋盟(고류여채약심맹) 아쉬움 남겨서 또 만나기 위함일세”

이쯤 되면 이규보는 가히 시문학의 ‘樂之者’라고 할 수 있겠다. 꿈속에서 선녀들과 시를 즐길 뿐 아니라 심지어 신선을 이겼다. 그러기에 고려후기 유행했던 경기체가 ‘한림별곡’ 가사에도 이정언(李正言) 진한림(陳翰林) 쌍운주필(雙韻走筆)이란 칭송을 받으며 등장한다.

동국이상국집 서문을 지은 이수(李需)는 이규보에 대해 “시문을 창작하는 데에 있어 전연 옛사람의 수법을 답습하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詩捷(시첩)’이라 일컬었다. 王公大人들이 그의 명성을 듣고 초대해서 표현하기 어려운 사물을 시로 짓도록 청하면서 매구마다 强韻(강운)을 제시하면, 고시든 율시든 붓을 휘둘러 즉시 완성하였는데, 순풍을 탄 범선이나 전쟁터의 전마로도 그 빠르기를 비유할 수 없었다.”고 했다. 과연 樂之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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