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상칼럼 - 초가삼간의 행복 25

 

며칠 전 아파트에 살고 있다는 어느 분이 인터넷 게시판에 사연을 올렸다. 아침상을 치우고 있는데, 갑자기 누가 대문을 발로 차며 소리를 지르는 통에 놀라서 도어스코프 화면을 쳐다보았더니, 윗집 아주머니가 칼을 들고 소란을 피우더라는 것이었다.

이유인 즉, 직장을 다녀 집에 있을 시간이 거의 없는 아버지가 아침저녁 하루 두 번 정도 누마루(배란다)에서 담배를 피우는 데 냄새가 윗집으로 올라간 것이 화근이 되었고, 지금도 가슴이 떨린다며 해결책을 구하고 있었다.

층간소음, 흡연, 주차시비 등은 공동주택이 만들어낸 새로운 문제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아파트는 1930년 일본의 도요타 다네오에 의해 지어진 충정아파트이며, 현재는 인구의 절반이상이 아파트에 살고 있고, 여기에 다가구 연립주택 등을 포함하면 앞서 말한 이웃 간 사생활침해 시비 등은 이미 오래전부터 일상이 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환경은 인간의 행동과 사유 등을 통제한다. 따라서 주거환경으로서의 공동주택은 알게 모르게 그에 맞는 행동들을 요구했고, 행동양식으로 자리 잡았다. 필자는 아파트에 갈 일이 거의 없다. 몇 년에 두어 번의 경험이 전부이지만, 아파트의 주거상황은 거기에서 산다는 것 자체가 안타깝다 못해서 무엇에 홀려서 정신이 나간 미친 짓이었다. 수억을 호가하는 내 집 안에서도 마음 편히 걷지 못하고 발뒤꿈치를 들고 종종걸음을 쳐야하며, 집안 3대가 모이면 어린아이는 있게 마련인데 부모들은 뛰지 못하게 단속하느라고 모처럼 만남의 정담(情談)은커녕, 밥 한 끼 먹는 것도 가시방석이니 말이다.

아이들은 어디에서든 뛰어야 한다. 그것이 성장이고 발달이다. 집안에서의 행동은 자유롭고 편안해야 한다. 그래야 휴식이고 충전이다. 집은 각각 나름의 모습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나만의 개성이고 즐거움이다. 가족과 친지가 모이면 떠들썩 잔치를 벌여야 한다. 그것이 화목이며 이해와 소통이다...,...기분 좋게 한잔 한 가장(家長)이 아주 가끔은 옆집에 창피하다는 부인의 핀잔을 들으면서도 소리 높여 한 곡조 불러 재껴야 한다. 그것이 사는 맛이기 때문이다. 등등은 고사하고 우퍼스피커가 가슴을 때리도록 노래 한곡 듣지 못하는 자유가 박탈된 닭장 같은 집에 살면서도 오직 집값이 오르고 있다는 데, 기쁨을 두고 사는 웃지 못 할 서글픈 현실,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무지함은 서글픔을 몇 배로 보태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지나친 교육열기로 학군에 따라 집값이 뛰고, 어떻게든 그 동네에 살기 위해서 온갖 일들을 벌여야만 한다. 그러면서도 교육은 두말 나위없고 성장과 인격형성에 가장 중요한 집안에서 조차 맘 놓고 걷지도 소리 높여 노래 한곡 부르지 못하는 긴장감이 연속되는 살얼음판 같은 주거환경에 대한 반성이 없는 것을 보면 세상이 돈과 출세라는 도깨비에 홀린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집안에서의 불안감이 수년 이어지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스트레스를 받은 몸은 아프게 마련이다. 뿐만 아니라 인류 최고의 식품으로 평가받고 있는 전통발효음식을 만들 수도 없고, 설령 어디에서 구해 온다 해도 보관조차 할 수 없는 형편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문만 닫으면 이웃과 단절되어 남의 눈치 볼 일 없고, 남이 관리를 대신해주어 몸이 편하다는 것 외 삶의 질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불행하기 그지없다.

집은 지어놓은 것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살 사람이 직접 짓는 것이 원칙이다. 오래 살라는 의미를 담아 ‘목숨 수壽’ 한 글자를 100가지 모양으로 쓰듯이 과거의 집들은 모양과 구조가 모두 조금씩 달랐다. 그것은 집집마다 장맛이 다르듯 알게 모르게 주인의 생각과 집안의 형편이 반영되어 있다. 그런데 아파트가 일반화 되면서 장사꾼이 만들어 놓은 집이라는 제품에 인격체가 들어가서 맞추어 살아야하는 어처구니없는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이번 이야기는 다음에 이어가기로 하고 코로나로 인하여 쓸쓸하고 불안한 명절을 보내셔야 하는 고향의 어르신들의 안부와 건강을 여쭈오며 하루 빨리 극복되기를 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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