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향인 특집 인터뷰
PT. FASIC INDONESIA 김만희 대표이사

파식 인도네시아  김만희 회장
파식 인도네시아 김만희 회장

 

가난해서 술지게미에 취했던 왕피리 출신

최선이 희망’ 임을 알리는 게 마지막 소망

본인 어려웠던 시절 생각, 직원복지에 힘써

 

오래된 비포장 길을 걷다보면, 추억이 발목을 잡으며 쉬어가라 한다.

찔래꽃 줄기를 씹으며 신맛에 침이 고이던 그때도, 허기 채우려 술지게미 한 입 털어 넣고 취해서 굴러 떨어졌던 동네 언덕도, 칡뿌리 찧어 떡 해 먹던 사촌 팔촌도, 심은 적도 없는 데 계절마다 피어주던 들풀, 야생화도...

모두가 세월 속에 묻혀버린 울진군 서면 왕피리 867번지 동수골은 PT. FASIC INDONESIA 김만희 회장이 태어난 곳이다.

아홉 가구가 모여 살아 아홉 동네라 불렀지만, 오리 십리 건너 한 집씩 있어 산골 외딴집이다. 20리 초등학교를 산공부 들공부 하느라 1학년을 두 번 했었지만, 정규 과정의 전부였던 초등학교 졸업장이 그에겐 올림픽 금메달만큼이나 값진 것이었다.

中 자가 박힌 모자를 뽐내며 개선장군처럼 지나다니던 친구들을 부러워하며, 작은 할아버지께 한문공부를 배우던 그때는 외롭고 힘들었지만, 그것이 훗날 인생역전의 밑천이 될 것이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저 산 너머 꿈이 있을 거라 생각하며,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호시탐탐 가출할 기회를 엿보던 열여섯 살의 어느 봄 날, 드디어 지표를 더듬는 마그마 같은 뜨거운 열정을 표출했다. 20리나 되는 가랄재, 박달재를 순식간에 넘어 도망쳐 간 곳은 대구였다.

친정조카를 피붙이라며 반갑게 맞이해 주시던 고모는 또래 외사촌이 둘이나 있어, 궁핍한 살림에 고모부 눈치까지 봐야했지만, 비밀리에 도시락을 챙겨 주셨던 것은 도시생활에서나 누릴 수 있는 행운이었다.

왕피리 집에서는 먹을거라고는 낡아 구겨진 함지박만한 양푼이 안에, 산`들나물을 많이 넣어 부피만 커보이던 유일한 끼니가 전부였다. 채소들 사이로 드문 드문 보이던 밥알을 먼저 쟁취하기 위해, 11개의 숟가락이 치열하게 곤두박질쳤었다.

간혹 눈치없는 이웃집 친구까지 숟가락 들고 달려들면 점점 작아지는 내 몫으로 인해 슬픔이 분노로 변하기까지 하던 시간을 생각하면, 반찬은 없었지만 고모님의 온전한 도시락은 혼자만의, 꿈꾸지도 못했던 축복이었다.

초등 졸업이 학력의 전부이기도 했거니와 일을 하면 돈을 받는다는 개념도 없이 취직한 터라, 아는 것이 없었다. 궁핍한 살림에 월급을 보태라는 고모부 말씀을 듣고서야, 일을 하면 받게 되는 월급이라는 것을 낮선 조폭들이 가로 챈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열여섯 김만희 회장의 도시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제1,2공장 전경
제1,2공장 전경

 

꿈이라는 것이 생각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엄마 목소리는 꿈속에서라도 듣고 싶었다. 공장 근처를 달리는 기차 발통소리는 수시로 가슴을 흔들어 됐고, 마음의 보따리는 늘 짐을 싸서 다시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달리는 저 기차의 끝나는 어딘가에 내 꿈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깊어지던, 새벽잠이 깨인 어느 날 달리는 기차에 무인승차로 몸을 싣고, 마지막 종착역인 부산 초량역에 몸과 꿈을 같이 내렸다.

먹고 잘 곳이 필요했던 열여섯살 꼬마 김만희는 ”숙식제공 꼬마구함‘ 이라는 구인광고를 따라 성일양복점으로 들어갔다. 이것이 훗날 김만희 회장이 남성 정장 단일 품목으로서는 아시아 최대 기업인 FASIC을 세우게 되는 시발점이 될 줄이야...

오십년 세월이 흘러 아시아의 양복 제왕이 된 그는 그 시절을 회상하며, 원하는 직원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있다. 호텔에 버금가는 기숙사, 노조가 필요없는 복지 혜택, 받은 것보다 더 많이 돌려주는 기업마인드를 가지고 기업 "파식" 을 경영하고 있다.

파식의 대표 브랜드 남성 정장 완제품 -- 국내 유수기업에 납품되고 있음
파식의 대표 브랜드 남성 정장 완제품 -- 국내 유수기업에 납품되고 있음

 

*가장 힘들 때가 언제였나요? “한 번도 힘들지 않았던 적이 없었어요. 이전에도 이후에도 삶 자체가 힘든 것 같아요.” 하며 웃으신다.

*가장 보람있었을 때는 언제인가요? “아직은 미완성입니다.” “고향에 내려와 희망 학교를 설립하고, 희망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희망을 가지게 될 때, 그때 쯤 보람이 생길 것 같은 데요.”

*개인적으로 기뻤을 때는 언제였나요? “제 가치를 인정받았을 때입니다.” 성일양복점에서 심부름을 하다가 성실함을 눈여겨 본 거래처 직원에 의해, 더러 눈썹 휘날리게 뛰지 않는다. 고무신 타이어 타는 냄새가 나지 않는다.“ 며 구박 아닌 구박도 받았었지만... (웃음)

반도 폐선으로 스카웃 되어갔어요. 다시 코오롱으로 스카웃 되었다가 제일모직에서 양복을 만든다는 소식을 접하고, 윗 분이 옮겨 가면서 저를 데리고 갔어요. 삼성 갤럭시라는 양복이 만들어 질 때는 기획단에서 일했구요.

이후에 삼성 일본지사로 가기 위해 언어 고시 네 번 만에 합격을 하고, 500대1의 경쟁을 뚫었어요. 정식 직원이 아닌 촉탁계 직원으로서는 대단한 행운아였지요. 일어를 잘하게 된 동기는 초등학교 졸업하고, 작은 할아버지에게 3년간 배운 한문 덕분이었어요. 동네 중학생 친구들을 보면 부러워했는 데, 이런 날이 올 거라곤 전혀 상상하지 못했지요.

이후 88년부터 3년간 일본 니소와이 그룹 FIRST MAN 양복 회사에서 근무하고, 93년부터 97년까지 삼성 나고야 지점에서 근무한 경력`실력을 인정받아, 9년 전 내 가치를 45억원 이상이라고 인정한 일본회사로부터 투자를 받아 지금의 FASIC이 탄생했어요.

그 시절만 해도 초등 학력으로는 태권도를 가르치는 사범을 하는 것이 힘들었는 데, 취미로 하게 된 태권도의 사범까지 하게 되어 무척 기뻤지요.

공장 내부 전경 1
공장 내부 전경 1

 

공장 내부 전경 2
공장 내부 전경 2

 

*FASIC의 규모는 어느 정도이며, 직원은 몇 명이나 되나요? 1.2공장이 있어요. 약 2만평의 부지위에 약 6천여평의 공장입니다. 2공장은 국내 유명 남성 정장`코트 브랜드와 합작이구요. 직원은 3,000명 쯤 됩니다. 평직원 월급은 그곳 공무원 월급보다 많구요.

아직도 직원 면접은 저가 직접 봅니다. 재봉틀로 수를 놓게 해서 그 작품을 보고 디자인실이나 재봉실 등으로 배치를 하지요

* 노조가 없는 회사라지요? 일화가 있어요. 그곳 조폭들이 회사밖에서 노조를 결성해서 회사로 들어오려 하자, 직원들이 ‘우리 회사는 노조가 필요없다 라며, 몰아 낸 적도 있어요.’ –웃음

*어떤 마음가짐으로 사업을 하시나요? “예. 첫 번째는 갑자기 공장 앞 길이 떨어졌을 때,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은 생각하고 있는 가? 두 번째는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이 갑자기 없어질 때,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 세 번째는 지금과 같이 세계적으로 어려움이 닥쳤을 때, 보안할 수 있는 능력은 갖추고 있는가?” 하는 생각을 머릿속에 늘 가지고 일을 합니다.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으신 가요? ”“김만희를 만나면 손해 보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도록 하고, “받은 것보다 많이 돌려주고 싶은 그런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장시간 인터부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은?

지구가 ‘4만75키로미터’ 라지요. 그렇게 보면 우리는 시속 1,660키로를 뛰고 있어요.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해 살고 있어요. 나이가 들어가니 건강 염려도 생겨요. 챙겨야 할 회사 직원들을 생각하면서, 일이 든 건강이 든 최선을 다 하려고 노력중입니다. 이번에 귀국하여 코로나19 때문에  2주간 격리당했지만, 고향 땅에서 숨 쉬고 잠들고 했던 시간들이 어머니 품처럼 따뜻하고 행복했어요.

앞만 보고 달려오느라 뒤돌아 볼 시간이 없었는 데, 고향의 시간이 친구, 부모 형제, 이웃 모두를 돌아보게 하는 귀한 시간이었네요.

학력 제일주의인 우리나라에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이 얼마나 희망적인 지를 말씀드리고 싶어 인터뷰에 응했습니다. 귀향해서 살게 될 그날을 꿈꾸며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구나혜 울진신문 프리랜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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