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의 위대한 작품 안나 카레니나는 이렇게 시작한다. "행복한 가정은 대부분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들은 불행한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 " 역대 소설 첫 문장 가운데 최고의 명문으로 꼽히는 톨스토이의 이 간결한 주장은 오늘날에도 흔들림이 없다.

21세기에 사는 지금 우리들 가정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머릿속에 그리는 행복한 가정은 마치 견본이 정해진 것처럼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을 떠올리면 사연도 많고 탈도 많다. 개인의 가정 뿐 아니라 지구촌 각 나라 사정도 마찬가지다.

선진국들은 대부분 엇비슷하고 어려운 국가들은 갖가지 이유로 힘든 상황에 놓여있다. 그런데 역사를 둘러보면, 행복해진 가정이나 국가는 어느 한 때 행운을 만나거나 불행을 피하게 되는 우연의 계기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독일의 철혈 재상(宰相) 비스마르크는 이런 말을 했다. “()이 역사 안에서 지나갈 때, 그 옷자락을 놓치지 않고 잡아채는 것이 정치가의 임무다.” 지구가 공간적이라면 역사는 시간적 환경이다.

우리는 지구촌 울타리 안에서 역사를 공유한다. () 또한 그 시공간 안에서 우연이라는 외피를 입고 순간순간 스쳐간다. 불행을 피한 가정이나 국가는 때맞춰 신의 옷자락을 잘 낚아챘다.

톨스토이가 살았던 시대도 마찬가지였다. 안나 카레니나와 우리는 전혀 딴 세상에 놓인 사람인 것 같지만, 그 소설 안에서 벌어진 사건은 우리와도 관련이 있다. 소설 속에서 안나 카레니나가 자살을 선택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는 애인 브론스키가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그녀를 떠났기 때문이다.

브론스키가 참전한 전쟁이 바로 크림전쟁이다. 톨스토이가 직접 경험한 전쟁이기도 하다. 크림전쟁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냐 하겠지만, 유럽의 강대국들이 전부 크림전쟁에 몰두할 때,일본에게는 의 옷자락이 스치는 순간이었다.

동아시아 전 지역에 대한 유럽의 제국주의가 본격화되기 직전에 강대국들은 서로 전쟁을 하느라 바빴다. 특히 크림전쟁과 미국의 남북전쟁이 결정적이었다. 유럽 국가들이 크림지역에 관심을 집중하여 일본을 소홀히 하였고, 미국은 내부정치 상황의 혼란과 이어진 남북전쟁으로 일본에 관심을 두지 못했다. 그 공백을 이용하여 일본은 메이지 유신의 기초를 다질 수 있었다.

유럽 강대국들 입장은 중국과 마찬가지로 일본도 하찮게 보였다. 물론 일본은 일찍 서양과 교류를 해왔다는 점에서 주변국가와 다를 수 있겠지만, 러시아 일개 장교가 일본 정부를 무시하고 쓰시마에 막사를 짓고 연병장을 만들어, 반년 간 군대를 주둔시킬 정도로 만만했던 것이 현실이었다.

사쓰마(薩摩) () 무사들이 영국 상인들을 살해한 나마무기 사건(生麦事件)’에 희생된 영국인 4명의 목숨 값은 자그마치 10만 파운드였다. 아편전쟁에 패한 중국이 영국에게 배상한 금액이 130만 파운드였는데, 거의 10%에 해당하는 돈을 1개 번이 물어야 했다.

이 엄청난 배상액 때문에 훗날 우스운 이야기도 있다. 미국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이 암살당했을 때, 보고를 받은 막부 지도부의 한 사람은 이 사건도 일본 무사들이 저지른 것으로 보고 어휴, 이번에는 또 얼마나 배상을 해야 되나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그렇게 하찮게 보였던 일본이 강대국들이 시선을 돌린 사이 의 옷자락을 낚아챘다. 대규모 유학생을 파견하여 서양문물을 흡수하였고, 존왕양이를 통해 메이지 유신을 이루었다. 그리고 보불전쟁으로 유럽이 또다시 전쟁에 휩싸였을 때 일본은 급성장한다.

이후 청일전쟁의 일본 승리로 우리나라 운명까지 좌우하게 된 것이다. 안나 카레니나의 애인 브론스키가 참전한 크림전쟁은 중국이나 한국에게도 신의 옷자락일 수 있었다. 그러나 붙잡지 못했고 불행한 운명을 맞았다.

훗날 우리나라도 짧은 시간에 최빈국을 벗어나 여기까지 오게 된 과정에서, 신의 옷자락을 붙잡은 순간이 분명 있었겠지만, 지금은 실패한 역사로 낙인이 찍혀 말도 꺼내지 못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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