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명룡 칼럼 )

보일러가 고장이 나서 교체하는 중에 이왕이면 창고도 정리할 겸 구석에 박혀있던 낡은 수납장까지 버리게 되었다. 서랍을 정리하는데 맨 아래 칸에서 빛바랜 제도기 상자가 나왔다. ‘STANDARD’라는 글자가 희미해진 플라스틱 뚜껑을 열어보니, 스테인리스로 된 제도용구들이 스펀지 홈에 가지런히 꽂혀있다. 수십 년 세월에 살짝 만지기만 해도 바스러지는 스펀지와 달리 금속들은 멀쩡했다. 그러나 막상 컴퍼스를 꺼내보니 기억 속에 날렵하고 예리했던 그 옛날 이미지는 사라지고 요즘 아이들 조립장난감 보다 허술해 보인다. 컴퍼스와 디바이더 그리고 잉크를 넣어 굵기를 조절하며 선을 긋던 그 팬. ‘학부리 팬으로 불렸다는 것을 기억에서 더듬고 있는데, 아내는 내 손에서 제도기들을 빼앗아 쇠붙이로 분리수거 한다. 소중한 그 무엇이 내게서 떠나는 것 같다.

1970년대 중·고등학교를 다녔던 학생, 특히 남학생들은 제도기라는 물건에 환상을 가지고 있다. 그 까닭은 기술, 공업 등 남학생 교과목에서 반드시 필요한 학용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태극기 그리기에서 제도기는 절대적 아이템이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을 지나온 분들은 기억할 것이다. 1976년 어느 날 갑자기 전국 모든 중·고등학생들이 태극기의 원리를 배우고 태극기 그리기를 배웠다. ·고교 6년 과정 안에 별도로 정해진 수업이 있었던 것도 아니어서 중학교 1학년에서 고등학교 3학년까지 한꺼번에 태극기를 배우고 그렸다. 시간 안에 정확히 잘 그리는 학생들은 전교대회도 참여했고, ·군에서 열리는 큰 대회까지 참가할 수 있었다. 전국 모든 학생들이 매달려야 할 정도로 중요한 수업인데 교과 과정 안에는 없고, 왜 하필 1976년이었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훗날 대학에서 류승국 교수의 수업을 듣고 그 이유를 알았다.

1974815일 광복절, 대통령 영부인이 조총련 소속 한 청년의 권총에 맞아 서거했다. 조총련이라는 단체가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크게 알려진 사건이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여러 부분에서 남한은 북한보다 뒤쳐져 있었다. 예컨대 1974년은 북한이 컬러TV 방송을 시작한 해이기도 하다. 제일동포 규모도 조총련이 절대 우세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던 것이 이듬해(1975) 추석을 앞두고 온 나라가 들썩이는 소식이 전해진다. 조총련을 포함한 제일동포가 대규모로 한국으로 고향방문을 하게 된 것이다. 경제적 또는 기술적인 도움이 절실했던 한국 입장에서 그들의 모국방문은 일대 파란이었다. 재일동포 북송사업까지 벌이며 북한을 돕던 조총련 단체들이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으니 그들에게 남한을 홍보하여 호응을 이끌어내는 것이 당시 공직자들의 사명이었다.

동포들을 태운 유람선이 부산항에 오륙도를 돌아가는데 유람선 앞에는 태극기가 펄럭였다. 우리 국기를 처음 본 교포들이 안내자들에게 저 태극기가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물었다. 그러나 태극기를 설명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비상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인솔자들은 급히 상급기관에 보고하였고 대통령까지 전달되었다. 대통령이 문교부(교육부)에 긴급지시를 내렸지만 교과과정에 없는 태극기를 설명할 공무원은 아무도 없었다. 문교부는 서울대학교에 태극기 전문가를 타진했고 사태가 심각해진 것을 파악한 서울대는 동양철학과가 따로 있는 성균관대학교에 떠넘겼다. 그리하여 태극기 해설은 류승국 교수의 손에 맡겨졌다. 그 모든 과정을 대통령은 초조하게 지켜보고 있어야만 했다. 류교수는 밤새워 논문을 작성하였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國旗國家와 민족을 상징하는 숭고하고 신성한 標識으로 시작하는 태극기 해설서다. 감동한 대통령이 즉시 청와대로 류 교수를 초청해서 감사를 표했다고 한다. 류교수는 불과 52세에 한국학술원 정회원으로 등극했고 얼마 후 한국 정신문화연구원장에 임명된다. 삐걱거리는 100원짜리 컴퍼스로 태극기를 그리다가 제도기를 만났을 때 그 느낌이 세월 속에 버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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