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명룡 칼럼>

임명룡 서울지사장
임명룡 서울지사장

송화 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집 눈 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 대고 엿듣고 있다/ 박목월의 시() <윤사월>이다.

짧은 시가 마치 한 폭의 동양화 같다. 산을 좋아하는 나는 이맘때 관악산 양지기슭을 자주 찾는다. 소나무 등걸에 기대어 새소리와 함께 봄바람을 쐬노라면, 박목월의 <윤사월>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윤사월은 보통 양력 5월 중순에서 6월 초에 든다. 봄날이 지날 즈음 녹음이 짙어질 때여서 세상이 온통 청록으로 살아 움직인다. 생동 넘치는 세상에 꾀꼬리 소리까지 더해져 운치에 젓는데, 외딴집 산지기네 눈 먼 처녀가 콧등이 시큰거리게 한다. 계절과 시공간(視空間) 그리고 연민정서가 어울려 애잔하게 여운을 만든 시다. 그러나 시의 모티프가 되었을 다음 이야기를 들으면 달라진다. 시인은 왜 <윤사월>에 산지기네 눈먼 처녀를 등장시켰을까.

사람들에게 효녀심청의 아버지 이름을 물으면, 대부분 심봉사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심청이 아버지 이름은 심봉사가 아니라 심학규다. 봉사(奉事)는 조선시대 벼슬 이름으로 돈녕부나 혜민서 같은 데서 근무하는 종8품 관리다. 조선에도 시각장애인 특별전형이 있었고, 주로 서민 환자들의 치료를 맡아보던 혜민서 봉사에 천거되었다. 그 이유는 시각이 불편한 대신 뛰어난 촉각으로 환자를 진맥하는 능력이 탁월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시각장애인들이 섬세한 손끝으로 안마도 하고 침을 놓기도 하는데, 그 연원은 혜민서 봉사에서 비롯한다.

한편으로 시각 장애인들이 봉사 벼슬을 자꾸 맡다보니, 나중에는 봉사가 일반 맹인(盲人)을 달리 부르는 말로 뜻이 전이된다. 그래서 심청이 아버지 심학규가 심봉사로 불린 것이다. 그런데 처음에는 분명히 시각장애인을 예우하는 호칭이었으나, 심학규 같이 덜떨어진 사람까지 봉사로 불리다보니, 봉사라는 말이 점차 맹인을 천시하는 용어로 변하게 된다. 그래서 점차 맹인을 부르는 호칭이 참봉으로 대체하게 되었다.

참봉은 왕릉을 비롯하여 왕가[宗室]의 무덤을 관리하는 벼슬이다. 9품으로 미관말직이지만 맡고 있는 무덤[]의 위치나 종친등급에 따라 위세가 엄청나기도 했다. 무덤 주변의 산과 토지를 관리하니, 그 인근 주민들한테는 고관이 따로 없었다. 시집가는 새색시가 탄 가마도 참봉댁 앞에서는 내려서 걸어갔다고 할 정도로 시골 상전이었다. 그런가하면 왕족이라 해도 종친부 등급이 낮아 외진 산골에 무덤이 있는 경우, 무덤을 관리하는 참봉도 위세가 그만큼 낮았다. 그런 곳에 부임되는 참봉 중에 시각장애인이 많았다. 그 때문에 참봉이 봉사를 대신해서 맹인의 호칭으로 대체되었던 것이다. 맹인 참봉은 눈으로 못 보는 대신 탁월한 청각으로 산림을 관리했다. 외진 산골에서는 인위적인 소리가 거의 없다. 청각이 밝은 사람은 먼 데서 나는 소리만 들어도 도끼질인지 톱질인지 구별이 가능했다.

이제 이야기를 정리해보면 박목월의 <윤사월> ‘산지기 외딴집 눈 먼 처녀는 산골 참봉댁 따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시인은 시적 서정을 살리기 위해 아버지 대신 눈먼 처녀를 상정한 것이다. 연민정서는 약한 사람에게 더 끌리게 마련이다. 남성보다 여성이, 어른보다는 어릴수록 연민의 강도가 높아진다. 그렇다면 <윤사월>의 사실적인 모습은 어떠했을까. 까마득한 옛날로 돌아가 윤사월 어느 산골 풍경을 그려보면 아마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송화 가루 날리는 외딴 산골에, 눈은 멀어도 귀는 밝아 산 관리를 잘하는 늙은 참봉이 어여쁜 딸과 함께 살고 있다. 때는 윤사월이라 산속에는 온갖 소리들이 생동한다.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나물 캐는 아낙네들이 떠드는 소리. 문설주에 기대앉은 참봉어른은 소리들을 엿듣다가 꾸벅꾸벅 졸고, 엿보고 있던 아랫마을 총각이 소나무 뒤에서 뻐꾸기 소리를 낸다. 그 소리에 참봉 댁 예쁜 처녀가 정지문을 빼곡 열어 엿보고 있다. 아름답기 여지없는 봄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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