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준 문화원장의 글창고

우암 종손 윤영재씨가 우암선생의 신도비를 설명하고 있다./ 안쪽은 삼조어비각
우암 종손 윤영재씨가 우암선생의 신도비를 설명하고 있다./ 안쪽은 삼조어비각

지난 6.17 일 매화면 금매2리 몽천마을 삼조어비각 (三朝御批閣)‘ 앞에서 국학 진흥원 기탁 자료 발간 기념식이 열렸다. ‘파평 윤씨(坡平 尹氏) 야성군파(野城君) 우암종택(憂菴宗宅)에서 소장하고 있던 문중자료 1,555점을 국학진흥원에 기탁하고, 국학 진흥원에서는 기탁받은 자료들을 책자로 발간하여 문중과 지역에 알리는 행사였다. 이 기념식에는 각급 기관단체장과 지역 유지들, 그리고 파평 윤씨 문중 대표들과 멀리 서울과 안동 등지에서도 관련 귀빈들이 참석하였다.

일반적으로 종손이 소장하는 문중의 자료들은 완벽하게 보관하기는 힘들다. 가장 염려되는 것이 도난문제이다. 그리고 습기나 벌레등으로 인한 훼손을 완벽하게 막을 기술과 장비가 없기 때문에 안전한 보관을 위해서는 전문 기관에 위탁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하겠다.

이번에 우암 문중에서 국학 진흥원에 기탁한 자료는 고서 439, 고문서 832, 목판 217, 서화류 27, 현판 15, 기타 25점 등 총 1,555점이나 되어 야성군파 문중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 지 짐작이 된다.

파평 윤씨의 시조는 윤 신달(尹莘達)’로 고려 때 태조 왕건을 도와 후삼국을 통일한 개국 공신이다. 야성군파(野城君派)는 시조 윤신달의 14세손인 윤 혁(尹 赫)을 중시조로 삼는다. ‘윤 혁은 고려말 충숙왕의 부마로 영덕을 식읍으로 하사 받고, 달산면에 정착하게 된다. 그 후 조선이 개국되면서 고려 공신들에게 화가 미칠 것을 우려하여 기성면 마산동 (삼산리)으로 옮겨오게 된다.

시조 윤신달로부터 23세인 윤몽열(尹夢說)은 대해(大海) 황응청(黃應淸) 문하에서 학업을 닦고 몽천(蒙泉) 마을에서 몽천서당을 열어 후학을 길렀다. 이어서 24세인 우암(憂菴) 윤시형(尹時衡)은 성균관 생원으로 있다가 낙향한 뒤 지역에서 많은 인재를 배출하여 지역 유림계에 명성을 떨치는 한편, 울진 지역에서 유학을 발흥시킨 중심인물이다.

현재 우암 종택의 종손인 윤영재 (1942년생)씨가 거주하는 몽천마을에는 삼조어비각’(三朝御批閣) 있다.

삼조어비각에는 야성군파 문중의 선비들이 3대에 걸쳐 세 임금에게서 받은 비답을 보관하는 각이다.

근남면 배잠동의 윤씨 문중 묘역/ 맨 앞 비석이 황림 윤사진의 묘비
근남면 배잠동의 윤씨 문중 묘역/ 맨 앞 비석이 황림 윤사진의 묘비

 

24세손인 우암 윤시형(憂庵 尹時衡)1656년 효종 임금에게 백성들의 고통을 열거하며 바른 정치를 호소하는 내용의 만언소(萬言疏)를 올렸다. 효종 임금은 만언소 내용이 너무 감동적이고 현실적이라 관보에 실어 전국에 배포토록 조치하고 비답을 내렸다. 또한 25세손인 윤여룡(尹如龍)1678년 숙종 임금에게 국가편의 17(國家便宜 十七條)를 올려 임금으로부터 고맙다는 내용의 비답을 받았다. 27세손인 황림(皇林) 윤사진(尹思進)정관치설(井觀癡說)’이라는 성리학 관련 글을 지었는데 정조대왕이 이 글을 읽어보고 울진같은 벽향에서 이와 같은 달견지사(達見之士)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희귀하고 기쁜 일이다. 그의 저서를 읽어보니 참으로 철리(哲理)가 고금에 뛰어나다. 그의 저서를 출판하고 그 판각을 내각에 바쳐 간수하라는 비답을 내렸다.

황림 윤사진은 울진 불영사대웅보전(大雄寶殿)’ 전액(殿額)을 쓴 분으로 알려져 있다. 유학의 뿌리가 깊은 지역에서도 한 문중에서 삼조(三朝)에 걸쳐 임금의 비답을 받은 경우는 드문 일인데, 우암 문중에서는 3대에 걸쳐 세 임금의 비답을 받았으니, 이는 가문의 영광이기도 하지만 울진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문중에서는 어비각을 짓고 임금의 비답을 보관하였다.

 

야성군파 우암 문중은 임금의 비답뿐만 아니라 각종 문집(文集)을 비롯하여 고서(古書), 시권(試券), 교지(敎旨) 간찰(簡札), 현판(懸板) 및 목판(木版), 호패(號牌)까지 귀중한 자료를 철저히 보존하고 있었다. 울진에서 이렇게 많은 자료들을 온전히 보존하고 있는 문중은 드물다.

특히 원중기(元重記)’라는 문서는 민가에서 보기 드문 희귀 자료로서 연구가치가 높다고 한다. 중기(重記. 重紀)는 본래 관청에서 물품목록을 기록하는 이른바, ‘물품대장인데 민간에서 발견된 것은 특이한 사례라고 한다. 그런데 관청이 아닌 일반 문중에서 원중기(元重記)를 쓴 것을 보면, 대 문중에서도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문중이 크다보면 관리해야 할 재산이나 물품들이 많았을 것이다. 남에게 빌려주기도 하고 파손된 것은 새로 구입하거나 보수도 해야 하니, 올바른 보관 관리를 위해 문중 차원에서도 물품관리대장이 필요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어쨌던 다수의 희귀한 자료들을 오랫동안 보관해 온 우암 종택에 감사드리며 안전하게 보관 할 수 있는 길을 택한 것에 찬사를 보낸다. 이번 자료기탁을 통해 파평윤씨 우암 가문이 울진 유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훌륭한 가문이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기회가 되었다 하겠다. (*)

 

 

 

 

/글과 사진-김성준 울진문화원장 

 

저작권자 © 울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