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명룡 칼럼>

 

스마트 폰에 일간지 모바일 앱[application]을 깔면 매일아침 그날의 주요 뉴스가 팟캐스트로 전달된다. 아프가니스탄 정부군이 탈레반에 무기력하게 항복을 하던 날, 팟캐스트 서비스는 당나라 군대·여성인권 실화?’라는 제목으로 문자가 떴다. 안타까운 소식이지만 당나라 군대라는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흔히 오합지졸의 무기력한 군사를 당나라 군대라 한다. 출처도 모호하고 의미도 확실치 않은데다가 알다시피 당나라는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국경을 중앙아시아까지 넓힌 강대국인데 오합지졸이라니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초강대국도 기세가 다하면 꺾이게 마련이고 무너질 때는 허망한 그림자만 남는다. 당나라 군대도 그랬다. 그 정점에 고구려 출신 고선지(高仙芝) 장군이 있었다.

668년 고구려가 망하고 대량의 유민들은 당나라로 강제이주를 당했다. 그 후 30년이 지났을 즈음 고선지가 태어났다. 아버지 고사계(高舍鷄)는 안서도호부를 비롯한 당나라 서북 변방을 지키는 장군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전쟁터를 누벼온 고선지는 덕분에 20세 남짓 젊은 나이에 유격장군이라는 지위에 오른다. 마침내 747년에는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배정받아 1차 서역 정벌에 나섰다. 험준하기 이를 데가 없는 천산산맥을 넘는 강행군을 거쳐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북동부에 위치한 오식닉국(五識匿國)에 다다랐다. 며칠간 휴식을 취한 고선지의 군대는 토번군 요새인 연운보를 기습 공격하여 순식간에 대승을 거두었다. 적군 5천명이 죽고 1천명이 포로로 잡혔다. 1천 필과 함께 획득한 병기는 이루 헤아릴 수도 없었다. 3년 후 750년 고선지는 또다시 천산산맥을 넘어 석국(石國; 타슈켄트)를 정복하고 그 나라 국왕을 포로로 삼아 장안으로 압송했다. 그로인해 중앙아시아 72개 소국들이 당나라에 조공을 하게 되었다.

고선지의 당나라 군대가 절정기에 오른 바로 그해(750) 세계사에 중요한 변곡점이 발생한다. 이슬람권에서 압바스(Abbasids) 왕조가 탄생한 것이다. 앞서 632년 이슬람교를 창시한 마호메트가 아들 없이 죽고 이슬람권은 1백년간 복잡한 후계다툼이 있었다. 지면상 간단히 줄이면 마호메트의 처남인 오트만과 마호메트의 사위인 알리의 정통성 갈등이었다. 3대 칼리프인 오트만과 같은 가문 출신 무아위야가 알리를 죽이고 옴미아드 왕조를 세운다. 그는 마호메트의 언행과 행적을 모아 수나라는 성전(聖傳; 하디스)을 만들었다. 이후 수나를 존중하고 따르는 이슬람교가 수니파가 되고, 마호메트의 사위 알리를 후계자로 섬기는 이슬람교파가 시아파. 750년 아불 압바스가 페르시아와 시아파의 지지를 받고 압바스 왕조를 세워 순식간에 아랍의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다. 한편, 당나라 황제 현종은 어리석게도 고선지가 압송해온 석국 왕을 처형하고 만다. 소식을 들은 석국 왕자와 백성들이 압바스에게 복수를 요청했고, 한창 기세가 오른 압바스는 군대를 중앙아시아에 파병했다. 이듬해 압바스 군대는 탈라스에서 고선지가 이끄는 3만 명의 당군을 초토화시키고 그 지역을 이슬람권에 귀속시켰다.

이어서 안녹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의 난, 그리고 황소(黃巢)의 난까지 겹친 당나라는 급속도로 무너진다. 안록산을 동관에서 막지 않고 섬현(陝縣)으로 물러났다는 책임을 물어 현종은 고선지를 처형했다. 군인을 대우하지 않는 나라는 망하게 마련이다. 황소의 난 때 당나라 장군 유거용(劉巨容)은 호북에서 난군을 격파했다. 부하 장수가 승세를 탔으니 황소를 추격하면 전부 섬멸할 수 있다고 공격할 것을 권했다. 유거용이 대답하기를 전투를 끝내는 것은 좋지 않다. 나라가 위급할 때는 군사들을 열심히 위무하고 상을 내리지만, 나라가 편안해지면 오히려 사소한 죄를 물어 그들을 버린다. 차라리 적을 남겨두어 군사들의 부귀자본으로 삼는 것만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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