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가삼간의 행복 36

<범상칼럼>

살아가는 터를 잡는 것을 풍수라 한다. 풍수에서 기본은 산을 등지고 물을 바라보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이다. 이것은 바람을 막아주고 성과 같은 방어막으로서 생산활동이 불리한 산 쪽으로는 집을 짓고, 물이 가까운 농사에 필요한 땅을 최대로 확보하는 것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현대사회의 주요생산은 1차 산업의 토지에서 공장과 사람에게로 옮겨갔다. 요즘은 집을 지을 때 배산임수의 자연지형을 따지기 보다는 공장과 사람이 많이 몰려 살며, 분양요건주거의 목적은 물론, 투자가치가 있는 자본재로서의 집이 최우선시 된다. 그렇지만 어떤 방식으로 집터를 선택하든지 간에 삶에 필요한 생산력이 가장 먼저 고려되며, 한편으로는 외부환경이 미치는 영향력의 강도는 자연환경에서 사회(문명) 환경으로 점차 이전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사람처럼 외부환경을 선택하여 옮겨 다닐 수 없는 식물들의 생존방식과 그 땅에 살아가는 생명체들의 기본이 되는 미생물과의 관계를 통해 명확히 인식되지 않는 인간과 자연의 연관성을 추론해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어떤 식물에 진딧물이 과도하게 번성하게 되면, 그 식물은 진딧물의 천적인 무당벌레가 모여드는 물질을 내뿜어 생존을 모색한다. 뿐만 아니라 뿌리를 박고 있는 땅에 필요한 영양소가 없거나 부족 할 때 역시, 그 영양소를 만들어내는 미생물의 먹이가 되는 물질을 분비하여 미생물을 키워냄으로서 부족함을 채운다. 이처럼 모든 생명체들은 생존이라는 최종의 목적을 위해 어떤 방식으로든지 알게 모르게 서로서로의 관계를 형성한다.

우리나라는 북위 33~43도 경도 124~132도에 위치하고 있다. 태양을 중심으로 보면 동일 위도에 위치하는 땅들의 기온은 거의 같겠지만, 위도와 경도가 만나는 특정지점의 자연환경은 나름의 특수성을 가지며, 그 특수성은 인간과 생명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한국인, 한국의 문화라고 하면 북위 33~43도 경도 124~132도에서 대를 이어 생존해온 사람들, 그 사람들이 만들어낸 유무형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한 때, 우리민족은 한반도를 벗어나 대륙을 호령하기도 했다. 그런데 유독 북위 33~43도 경도 124~132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어떠한 외세의 침략도 극복하고 인류역사에서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단절 없는 문화의 영속성과 일관된 역사일제 35년을 제외하고는 주권을 완전히 빼앗긴 적이 없는를 이어오고 있다. 그래서 한국인에게는 인류보편과 차별되는 무언가 특별함이 있다.

다시 말하면 지난 호에서 말했듯이 우리민족은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연중 기온의 변화가 40~50도를 넘나드는 혹독한 사계절과 그것을 극복한 미생물을 기초로 한 동식물, 그리고 순상지(현재의 육지가 바다에 잠긴 적이 없는)가 만들어내는 좋은 물의 영향으로 특유의 기질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국인은 은근과 끈기, 그리고 불편한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성급함과 역동성이라는 다소 상반된 듯 보이는 이중적 기질을 조화롭게 유지하고 있다. 은근과 끈기는 국토 전반을 변화무쌍 솟아오르고 휘감아 도는 산천처럼, 빠르게 변하고 혹독한 사계절의 환경에서 어떤 방식으로든지 살아가겠다는 의지의 발로라면, 성급함과 역동성은 그때그때 변하는 환경에 대처하여 살아가며 자연스럽게 습득한 생활습관으로서 같은 맥락을 이루고 있다.

한국인들은 1년에 네 번 바뀌는 사계절의 빠른 변화에 적응해야 한다. 빠른 변화는 빠른 합의와 빠른 결정을 요구한다. 합의와 결정은 변화라는 조건에 의해 매번 달라짐으로 그 생명력은 변화의 속도에 비례한다. 그래서 한국인은 사계절의 변화만큼이나 극히 짧은 합의와 결정으로 살아간다. 이것을 자학적으로 비하하여 냄비근성이라 하지만 한국인의 역동성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냄비근성이 되었던 역동성이 되었던 순간순간 단결력 없이는 끓어오르지도 못하고 힘차게 뛰쳐나가지도 못한다. 북위 33~43도 경도 124~132도에서 만들어지는 이러한 역동성이 SNS사회에서 무한한 힘을 발휘한다는 게 오늘날 세계인들의 평가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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