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명룡 칼럼>

 

고등학교 때 국사를 배우면서 임오군란(壬午軍亂)에 이르면 화가 치밀어 올라 모두가 분개했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군인들에게 13개월이나 봉급미를 지급하지 않았고, 마침내 겨우 한달치의 급료를 주면서 되()의 크기를 줄이고, 게다가 겨가 반이고 모래가 반이었으니... 조선 말기 처참한 풍경은 어린 나이에도 충격이었다. 이밖에도 조선시대 군인들의 대우는 열악했다. 군인은 점심을 먹지 않았으며, 변방에서 수자리를 사는 병사들은 직접 농사를 지어 군량을 장만하고, 옷이며 소모품은 개인이 장만했다.

요즘 해마다 봄철이면 버드나무에서 날리는 꽃가루 때문에 피해를 겪는 사람들이 많다. 꽃가루 알레르기로 고통을 겪는 사람도 있고, 여기 길 가에 흉스럽게 널브러져 청소하는 분들을 힘들게 한다. 그런데 조선시대는 그 꽃가루가 아주 귀한 대접을 받았다. 조선후기 학자로 남포 현감을 지낸 윤기(尹愭)버들 솜柳絮이라는 한시(漢詩)에 이런 내용이 있다. ‘기슭마다 바람 따라 흰 눈처럼 흩날리네/ 隨風岸岸雪輕飛 앞마을의 아낙네들 다투어 주워 모으니/ 前村癡婦爭收拾 수자리 간 남편 위해 옷 지으려 함일세/ 欲爲征夫作遠衣이처럼 버드나무 꽃가루가 방한복을 만드는 재료였던 것이다. 수자리 살고 있는 남편을 위해 꽃가루를 서로 주우려고 애쓰는 옛 여인들을 생각하면 코끝이 찡해온다. 그러나 조선시대 병사들도 이들에 비하면 양반 수준이었다. 바로 중국 송나라 군대 이야기다.

알다시피 송나라는 당시 세상에서 가장 부유하고 문화가 발전한 나라였다. 유럽 최고 일류 도시인 베니스를 이미 관광하고 온 마르코 폴로는 행재(行在), 즉 오늘날 항저우를 보고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의심할 여지없이 퀸사이(行在)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도시이다” 13세기 항저우 인구는 100만 명이 넘었다. 베니스가 10만이 넘지 않았다는 것을 염두 하면 엄청난 규모였던 것이다. 송나라의 도시 물질문화는 최고조에 달했고, 과학기술의 측면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아치형 다리와 받침대를 사용한 교량은 웅장하면서도 아름답기 그지없었으며, 항해를 할 때는 나침반과 수력 터빈을 사용한 선박을 이용했다. 화약과 강노(剛弩), 물시계, 땅을 깊이 파는 천공기술, 그리고 철을 단련하는 용광로와 수력 방적기 등이 모두 송나라 시대에 존재했다. 북송이 망하고 남송만 유지할 때에도 6천만 명의 인구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오늘날 프랑스의 네 배에 이르는 영토를 점유하고 있었고, 문화 또한 가장 찬란했는데, 어쩌다 몽골인의 침략에 무릎을 꿇었단 말인가.

송나라는 모병제였다. 그 모병이 처참했다. 송사(宋史)가운데 국방과 관련된 <병지(兵誌>를 보면 이런 기록도 나온다. “관청에서는 황제의 뜻을 실천하지 못하고, 백성들을 사로잡아서 병사로 삼았다.” 말이 모병이지 실제로는 백성들을 체포해서 강제로 군인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병지>에는 이런 내용도 나온다. “병사를 모으는 방법에는 혹은 감언이설로 여항 백성을 속이거나 유혹하고, 혹은 배의 이름을 속여서 상인의 배[商船]라고 하고는 봇짐장수 무리를 기다렸다가 갑자기 이들을 싣고서 군부대[兵營]로 떠난다. 혹은 배와 인부들을 사서 배에 사람이나 물건들을 그대로 실은 채 빠르게 예속부대로 향하고, 혹은 군인들의 부인들로 하여금 예쁘게 단장하고 길에서 남자들을 유혹하게 하여 유혹당한 사람들을 검은 물로 문신을 새겨 군인으로 삼았다. 이로 말미암아 들판에는 농사를 짓는 사람이 없고, 길에는 상인들이 없으며, 가끔씩 장정들 수십 명이 모인 다음에야 감히 도시로 들어간다.” 이 기록은 송나라가 멸망하기 직전의 것이다. 백성들을 사로잡아 병사를 만들고 도망치지 못하게 이마에다 문신을 새겼던 것이다. 송사<간신전>에는 가사도(賈似道)라는 사람이 포함되어 있다. 그가 간신으로 분류된 결정적인 이유는 부자들의 재산을 일부 몰수하여 군대의 양식으로 전용하려 했기 때문이다. 군인을 배불리 먹이지 못하는 나라는 망해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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