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명룡 칼럼>

 

임 명 룡 서울지사장
임 명 룡 서울지사장

동짓달 스무아흐레 날은 할아버지 제사가 있다. 또 닷새가 지나면 고조부(高祖父) 제사가 있었다. 사계절 가운데 겨울은, 단지 계절의 변화에 따라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넘어야만 [越冬; 월동]’ 되는 시절이 있었다. 삶의 릴레이에서 겨울은 높고 커다란 장애물이었다. 병약한 노인들은 대체로 겨울을 넘지 못하고 운명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옛날에는 겨울에 제사가 몰려있었다. 비록 경제적으로 몰락한 집안이어도 한 해 겨울동안 우리는 일곱 번의 제사를 지냈다.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인 경기미 생산단지는 경기도 여주 이천 지역이다. 지난해부터 이천시에서는 경기미를 국산 고유품종으로 대체하는 사업을 벌여왔는데, 올해는 90% 이상 달성할 예정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이름은 경기미인데, 그동안 생산 되던 쌀은 국산품종이 아니었다. 일본 품종인 아키바레, 고시히카리가 경기미, ‘임금님표 이천쌀이란 이름으로 제배되고 있었던 것이다. 학창시절 사회과 과목에는 지리 수업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 사회과부도라는 지도(地圖) 교과서가 별도로 있었다. 어렸을 때 사회과부도를 보다가 신기한 것을 발견한 적이 있다. <경기미 생산지>라는 지도에 경기도 일대와 경상북도 북부지역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경기미는 경기도 쌀이란 뜻인데 왜 경상북도 울진군에서 경기미가 생산이 되는지 궁금했다. 수업시간에 선생님께 여쭤보았지만 명확한 답변을 듣지 못했다. 아키바레, 고시히카리 등이 경기미로 불린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집집마다 볍씨가마니에 숯껑으로 크게 적혀있던 아키바레, 고시히카리, 아네모네가 그것이었다. 아주 찰지고 밥맛이 좋은 쌀이었다.

한편, 우리는 겨울 동안 제사를 일곱 번이나 지내다보니 집안에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일찍 가는 손님이 더 반갑더라, 씨암탉을 제사에 부조하고 그날로 돌아가는 고마운 분도 있었지만, 늦가을에 쌀 한 되 들고 와서 이듬해 봄 되고서 나가는 손님도 있었다. 그러다보니 사랑방은 언제나 노인들이 피우는 담배연기로 자욱했다. 어머니와 누나들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제사 준비와 상차림 그리고 삼시세끼 밥이며 술이며 손님을 대접 하느라 찬물에 언 손이 마를 날이 없었다. 어렵던 시절에도 접빈객에 빠져서는 안 되는 안주들은 다양했다. 쪄서 말린 곱세기(돌고래), 조선무와 차조밥으로 삭힌 밥식해, 간고등어와 가자미전, 한치 구이, 건진 국시…… 부엌 앞 봉당 위에 매달렸던 왕문어 세 마리에 다리가 모두 사라지고 몸통만 대롱대롱 남을 즈음, 구정(舊正)이 다가오고, 마지막으로 사랑방에 남았던 손님도 설을 쇠러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 그제야 어머니도, 누나들도 한시름을 놓는다.

요즘도 제사용 그릇[祭器]은 유기(鍮器)를 쓰는 집들이 꽤 있다. 그러나 지금 유기그릇은 모양새와 빛깔만 놋그릇과 비슷할 뿐 예전의 그것과는 품질이 전혀 다른 스테인리스 제품이다. 스테인리스가 없던 그 때는 놋그릇이 제기였고 평상시 밥그릇 국그릇이었다. 단지 제사 때는 반질반질 윤기가 나도록 닦아서 썼다. 금방 녹이 슬어버리는 제질 탓에 제사 전날이나 당일에 곱게 빻은 기왓장 가루를 짚수세미에 묻혀 박박 문질러댔다. 기껏해야 국민학생이었던 누나들이 그 일을 도맡아 했다. 게다가 매 끼니때마다 손님방에서 수북이 내놓는 놋그릇을 한겨울 냉수로 설거지를 했으니 누나들은 겨울이 오는 게 무서웠다.

아키바레 쌀은 밥맛이 좋고 찰지다. 문제는 너무 찰진 탓에 놋쇠에 붙어 굳으면 잘 안 떨어진다는 데 있다. 온수도 세제도 없던 시절, 설거지 담당 누나들은 놋그릇에 말라붙은 밥풀떼기를 떼는 일이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놋쇠 식기들은 공장에서 찍어낸 것이 아니어서 모양도 빛깔도 조금씩 다르다. 사랑방에 머무는 손님들도 조금씩 달랐다. 어린 아이들이 고생하는 게 안쓰러워 10원짜리 용돈을 주는 분도 계시고, 빈손으로 와서 반찬투정만 하는 먼 친척 할배도 계신다. 그런 노인 중에는 치아가 없어서 놋숟가락에 항상 밥풀떼기를 잔뜩 붙여 설거지를 내놓는 분이 있다. 순해빠진 누나들도 그 숟가락 설거지는 서로 미루다가 까맣게 변해버린 놋쇠숟가락은 이듬해 감자긁개로 쓰임새가 달라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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