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문의 세상만사> ....3

 

성류굴 앞을 흐르는 왕피천은 겨울 가뭄에도 여전하게 물줄기가 유장하다. 소나무와 측백이 어우러진 성류산의 회백색 벼랑이 햇볕에 반짝인다. 겨울 풍광인 골계미가 아름답다. 저 성류굴 벼랑과 둘레의 풍광은 일찍이 조선 시인 묵객들에게는 참으로 좋은 문자향(文字香)이자 예술적 소재였으리라.

 

조선의 천재 화가 단원(檀園) 김홍도(1745~1810?)가 그린 금강사군첩에 성류굴도, 망양정, 월송정이 등장한다. 김홍도는 관동팔경과 금강산을 그려오라는 정조의 명을 받고 대관령 넘어 동해안을 유람하면서, 강원도 남쪽 월송정을 그리고는 다시 북상하여 금강산을 그린 뒤 한양으로 되돌아갔다. 금강사군첩(金剛四郡帖)은 이렇게 탄생했다.

이보다 앞서 성류굴을 노래한 시인도 있었다. 세종도 감탄한 오세신동(천재소년) 매월당(梅月堂) 김시습(1435~1493)이다. 김시습 하면 우리나라 최초 연애소설금오신화(金鰲新話)로 유명하지만, 그는 본래 기일원론(氣一元論)을 주창한 성리학자였다. 그는 세조의 쿠데타를 반대하고 절의를 지킨 생육신의 한사람으로, 조정을 떠나서는 승려가 되었다. 세상을 방랑, 풍자한 천재 시인이자 기인(奇人)이었던 그가 조선 천하를 방랑하던 중 울진에도 들러 다섯 편의 시를 남겼다. 그 가운데 울진에 들르다(過蔚珍)’는 다음과 같다.

울진에는 외가 친척이 많은데/분파와 자손은 선사에서 나왔다네/사람들이 장건의 후손이라 말하니/계보가 한나라 신하의 집안이네/서역으로 일찍이 사신으로 나갔고/동쪽 삼한으로 또 수레 몰고 왔다네/오호라 때와 세대 벌어졌으니/바다 끝 저 멀리를 생각하네

 

김시습은 이 시에서 자신의 외가가 울진이며, 실크로드인 서역을 개척한 중국 한나라 장건의 후예임을 은근히 자부하고 있다. 선사 장씨가 울진 장씨인데 곧 한라나 때 이주하였음을 상기하고 있다.

울진 장씨의 도시조(都始祖)는 장정필(張貞弼), 그는 중국 절강성에서 태어났으나 당나라 말기 병란을 피해 신라에 귀화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장정필은 고려의 태조 왕건을 도와 병산대첩(현 안동)에서 견훤을 물리치고 크게 승리하여 김선평, 권행과 함께 삼태사(三太師)로 불렸다. 울진 장씨의 관시조(貫始祖)는 장말익(張末翼)이다. 그는 장정필의 5세손으로 고려 정종조 삭방도 안찰사(현 강원도, 함경도 도지사)로 재직시 울진 땅을 식읍으로 하사받아 울진장씨의 관시조가 되었다.

김시습 외가가 울진이고, 선사 장씨가 울진 장씨임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이런 사실을 울진장씨대종회회장인 장헌겸씨가 일러 주었다. 울진장씨대동보에 김시습의 부친인 김일성(金日省)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서문에 울진에 들르다라는 시가 있어 김시습이 울진 장씨의 외손임을 말해주고 있다.

 

김시습은 강릉 김씨로, 신라말 선덕왕대 시중(현 국무총리)을 역임한 김주원 계열이다. 김주원은 당시 왕위계승 0순위였다. 하지만 이를 결정하는 화백회의가 열리던 날, 폭우로 경주 알천이 불어나 김주원은 입궁하지 못해 결국 왕위계승을 놓친 인물이다. 이때 왕이 된 38대 원성왕 김경신이 이후 김주원에게 왕위를 권하였으나 사양하였다. 이에 감읍한 원성왕이 김주원을 명주군왕에 책봉하여 강릉 일대와 속현인 실직(삼척), 우진야(울진), 근얼어(평해)를 다스렸다. 이때부터 김주원은 강릉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김시습이 남긴 다섯 편 중 다른 하나인 성류굴에 묵으며라는 시를 소개한다. 맑은 왕피천과 성류굴 둘레의 산뜻한 봄 풍광을 읊고 있다.

굴 앞 봄물이 이끼 바위 위로 흐르고/바위 뒤 산꽃에 노을 햇살 비치네/여기에 또한 빼어난 맑은 흥취 있는데/깊은 밤 둥지의 학이 사람에 놀라 날아가네

 

울진에도 울진 장씨와 강릉 김씨 가문이 살고 있다. 울진 장씨 가문의 보배는 국보 181호인 장양수 홍패이다. 울진의 자랑이다. 김시습은 천재 문인으로서 강릉 김씨의 역사적 인물이다. 그는 조선 고전문학의 최고봉이다. 그들이 남긴 흔적과 유물에서 울진의 역사를 읽는다. 그래서 향토사는 울진인의 정체성이요 얼굴이자, 미래의 투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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