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문의 인문학 탐구<5>

 

올해는 울진이 낳은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요, 세계적 거장, 추상화의 북극성 같은 존재로 평가받는 유영국 화백이 세상을 떠난 지 20주년(200211월 작고)이 되었다. 그를 가리켜 산과 색채의 화가라고도 한다. 산은 내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라고 말했듯이 그가 평생의 주제로 고집한 것은 울진의 산과 바다였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울진읍 말루에서 산 하나만 넘으면 가슴 트이는 공석 앞바다였다. 남쪽으로는 왕피천과 남대천이 굽이쳐 동해로 흘러들었다. 더구나 서북쪽으로는 금강송이 울창한 통고산과 응봉산이 낙동정맥과 함께 병풍처럼 두르고 있기도 하다. 그러니 유영국의 그림에는 산과 바다가 많이 등장하는 소재였다. 그가 표현한 점,,,,색 등의 추상화에는 울진의 바다와 산, 태양이 담겨 있다. 따라서 그의 예술적 영감은 울진의 자연이 그 뿌리라 할 수 있다.

 

유영국 화백은 1916년 울진읍 말루에서 태어나 울진공립보통학교(1931년 졸업, 17, 현 울진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진학했다. 경성 제2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 일본인 담임의 친일 행위 요구에 거부하고 항의, 자퇴했다. 1934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문화학원 입학해 추상화를 전공했다. 그는 한국전쟁 시 죽변에서 양조장을 경영하기도 했다. 죽변 양조장에서 평생을 직원으로 근무했던 전찬종(87, 현 죽변 거주) 어르신에 따르면 그는 과묵했고, 기골이 장대한 미남으로 기억하면서, 일화 하나를 소개했다. 1970년초 전찬종 어르신이 한번은 술을 빚다가 뜨거운 독이 터져, 그 파편에 오른쪽 발을 크게 다쳤다고 한다. 그는 급히 서울로 후송되어 서울대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상처의 파상풍 예방이 급선무였다. 당시에는 구하기 어려웠던 게 파상풍 예방 주사약이었다. 하지만 유영국 사장이 백방으로 수소문하여 미군 부대에서 구해주어 치료가 잘 되었다면서 지금도 고마워하고 있었다. 그는 화가이기 전에 인간미 넘치는 따뜻한 사람이었다.

 

유영국은 1954년 나이 마흔에 잘나가던 양조장 경영을 접고 평생을 화가로 살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 대학에서 선생 노릇을 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이후 죽을 때까지 작품활동에 매진했다. 당시 추상화하면 일반인에는 더욱 낯선 미술이다. 더구나 돈도 안 되고 팔리지도 않는 그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호당 수억을 호가한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지난 12~15일 부산 벡스코에서 열린 아트부산전등에서 유영국 그림은 14억에 매진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필자에게도 유영국 화백의 그림을 감상할 기회가 있었다. 2016유영국, 탄생 100주년 기념전, 절대와 자유에 모교 교장으로서 초청장을 받고, 그의 작품전을 서울 국립현대미술관(덕수궁)에서 관람했다. 말로만 듣던 그의 작품은 한마디로 대형작이기도 했지만, 색채의 황홀감 때문에 압도되었다. 한편 2019년 여름에는 유영국미술문화재단을 방문해 유진 이사장(유영국화백의 장남, 전 카이스트대 교수) 에게서 유영국 관련 자료를 받기도 했다. 유 이사장은 고향 울진에 유영국 미술관 건립에 대해서도 당국과의 협력은 물론 긍정적 입장이었다.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유영국 화백이 작고한 지 올해가 20주년이다. 2010년 울진군에서 유영국 미술관건립에 대한 연구 용역까지 했지만, 지금은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이후로 울진군에서 말루 유영국 생가를 사들여 중수한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생전에 자기의 이름으로 미술관건립 등 아예 말도 꺼내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어쨌든 그는 한국 근대 미술사에서 전위에 섰던 분이요, 추상미술의 선구자였다. 더구나 한국의 자연, 그것도 울진의 자연을 아름다운 색채와 대담한 추상 형태로 빚어낸 최고의 조형감각을 지닌 작가로 추앙받는 분이다. 울진의 자부심, 유영국 화백! 이대로 올해를 그냥 지나기엔 너무나 아쉬운 것은 필자만의 느낌일까.

 

 

/김진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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