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기행문은 온정출신으로 교직에 계셨던 故 정영득 선생께서 1994년 중국을 여행하면서 백두산을 오른 기행문입니다. 이 원고는 후포역사연구회 신진철 부회장이 소장하고 있다가 요즈음 중국에 관한 관심이 매우 커진 상황에서 내용이 사실적이고 심도가 있어 그냥 썩히기는 아쉽다며, 본지 게재를 요청해 왔습니다. 신 부회장은 온정면과 울진군, 대구팔공산 등에 관한 기록과 개인논문, 향토사 참고문헌 등 원고지 약 1500장 분량을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 편집부

                           
 94년 9월 1일 김포공항에서 7시 분에 출발하여 2시간 후인 9시경에 북경(北京)공항에 도착하였다.
 북경(北京)의 거리는 전기불은 있어도 우리나라처럼 그리 밝지는 못했다. 버스로 분을 달려 도착한 곳이 큼직하고 웅장한 신만수빈관(新萬壽賓館)이였다. 비행기 안에서 잠을 잤던 탓인지 밤에 잠이 통 오지 않아 밤새도록 백두산에 대한 생각을 했다.

‘왜 우리나라 백두산도 중국을 거처서만 가야하는가? 참으로 원통한 일들이다. 누구를 원망하기 전에 나의 못난 탓으로 돌리게 차라리 마음 편했다. 도대체 중국이란 어떤 나라 이 길래  내가 이렇게 걸을 수 있단 말인가? 중국과 우리와의 관계를 알기위해 오랜 역사를 더듬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나라는 신라 때부터 이조에 이르기까지 조공을 보냈고 미여(美女)를 바쳤으며 왕위 계승의 인준을 받아야만 했다. 이런 일 저런 일을 생각다보니 늦잠이 들었다. 7시에 기상 신호에 따라 탑승 준비에 들어갔다.

 9월 2일 8시 출발 중국북경교공예미술관(中國北京郊工藝美術관) 공장을 견학했는데 규모가 상당히 컸다. 대신사람 수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우리나라 미술공예제조공장과 같은 곳이었는데 사무원과. 선전원 . 작업원등은 복장으로 구분되어있었다.

 도공들은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는데 전념이 없었고 1개의 도자기에 여러 가지 색으로 여러 가지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커다란 전시장에 크고 작은 도자기가 즐비하게 진열되어 홍콩의 밤거리처럼 아름다웠고 선전원들은 열을 올려 선전에 하였다.

 명십삼릉(明十三陵) 북경 서북쪽으로 50km지점에 명조3대 영락제로 부터 숭정(崇楨)황제까지 13명의 황제의 능묘가 있었다. 명 태조 주원장의 능묘는 남경에 있다. 영락제때 수도를 북경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중암의 장릉(長陵)부터 시작해 헌릉(獻陵) 경릉(景陵) 무릉(茂陵) 유릉(裕陵) 태릉(泰陵) 강릉(康陵) 영릉(永陵) 정릉(定陵) 경릉(慶陵) 은릉(恩陵) 덕릉(德陵) 숭릉(崇陵)등 13개 능묘가 있고 그 것 중에

○ 장릉(장릉): 13릉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 능이다. 명나라 제13대 황제인 여락제의 능묘이다. 지하궁전에 대해서는 아직 손을 대지 않고 있어 신비로움이 더 했다.

 영락 황제가 북경으로 도읍을 옮긴 다음 대신들에게 황조릉원을 안치할 장소를 물색하라고 당부했는데 한 대신이 석 달 만에 이 팔달 령에 인접한 천수산(天壽山)의 한 곳을 황제에게 알선해 큰 상을 받았다고 전한다. 능원 안에 있는 릉은전(陵恩殿)은 길이70m 푹30m 면적은1956㎡이다. 기둥은 녹나무 대목을 썼다. 사용된 거목은 운 남에서 5~6년을 걸쳐 운반된 것이란다.

○ 정릉(定陵): 장릉의 서남쪽에 있는 정릉은 명13대 황제 만역제(萬歷帝)의 두 황후를 매장한 능이다. 만력제는 22세에 즉위해 자기의 묘역을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6년의 세월과 8백만냥 그 당시 2년분의 국비에 해당을 들여 완성한 것이다. 능은 20m 깊은 곳에 있는 높고 화려한 지하궁전 이였다. 흰 대리석과 옥좌 황색유리기와 그리고 호화스런 부장품은 사후의 세계를 장식해주고 있었다.

 왕관. 금은 옥으로 만든 보식(寶飾) 은 현재 지상의 정릉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만력제는 생전에 완성된 이곳에서 대연 회를 베풀기도 했다. 이 왕릉은 근처에서 발견된 비석이 열쇄가 돼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돌비석 새겨진 비문을 전문가들이 풀어내 비밀을 밝혀냈는데. 비석은 그대로 정릉 박물관에 진열돼 있었다. 지하궁전의 제1실은 전전(前殿).

제2실은 보좌(寶座)가 있는 곳으로 황제 의자에는 용. 황후의자에는 봉황의 무늬가 조각돼  있었다. 제일 안쪽으로 후전(後殿)이 있었다. 그 위에 관이 세 개 나란히 놓여 있는데 가운데가 황제 양쪽이 황후의 것이다. 주익균(朱翊鈞)은 재위 48년간 정사를 돌보지 않고 여색에만 빠졌으며 술 취한 후 사람을 때리고 포악한 임금이었다 한다. 면적은 1195㎡이면 깊이가 27㎡이다.

 공원 내에 여러 가지 식물(植物)이 심어져 있는데 구화백(九花伯) 백송(白松)등이 희귀했고 목단(木丹)이 많이 심어져 있었다. 그 꽃 색을 보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

○ 만리장성(萬里長城) 월(月)에서도 보이는 유일한 인공물이라는 이 만리장성은 고대 중국에서는 군사용 장백 이였지만 지금은 중국을 대표하는 관광명소다. 기원전 춘추전국시기에 이미 출현 그때는 제(齊) 장성이라고 일컫고 그 후 초(楚) 진(秦) 연(燕) 월(越) 등 나라들이 국방 소수민족을 견제하기 위해서 장성을 쌓았다고 한다. 진시 왕이 그것을 연결한 것이다.

 진시왕은 흉노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감숙성에서 황하의 끝에 이르는 대장성을 수축했다. 이어서 한 무제는 기원전 2세기말 난주의 북쪽에서 서쪽 옥문관까지 장성을 연장시켰다. 산해 관에서 기곡 관에 이르는 8700㎞의 장성이 완성을 이룩된 것은 명(明)대에 이르러서였다.

팔달령은 명나라 때 개축됐는데. 지금 남아 있는 만리장성 중에서 가장 보존상태가 좋고 북경에서 70㎞ 밖에 되지 않아 관광객이 줄을 있고 있었다. 팔달령 장성의 높이는 8.7m이고 양쪽 벽 사이로 말이 몇 마리가 나란히 서서 달리 수 있고 또 일정한 거리마다 그 층의 성루가 있었다.

성루의 아래층은 수십 명의 병사가 거주할 수 있게 돼있고 위층은 관측소로 활용했다고 한다. 또 성벽 뒤 길에는 용통(甬通)이라는 연락통로가 있는데 약 110m 마다 돈대(墩臺)라는 봉화대가 있다. 봉화대 위에서 내 몽고를 바라보는 전경은 그 야말로 장관이다.

 성은 진조 때 쌓았으며 진흙을 구워 만든 벽돌로 쌓았으므로 풍화침식으로 많이 파괴되었다. 현재 보는 것은 명조 때 돌로 쌓았다. 한다. 그러나 지금은 수리인지 연장하는 것인지 작업을 하는 것이 보였다.

○ 우의상점(友誼商店) 만리장성 관광을 마치고 숙식소(宿食所)로 오는 도중(途中)에 우의상전에서 쇼핑을 했다. 일행 중에서 여러 가지 물건을 많이 구입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쇼핑이란 말은 유럽이나 중국. 여러 나라에 가도 여행사의 행사 중 스켈줄에 꼭 들어가 있다.

 쇼핑이란 핑계 삼아 속인다는 말과 같게 여겨져 별로 사고 싶은 의욕이 없었다. 물건 값이 염가라 하면서 데리고 갔지만 더 비쌌다.
그래서 관광객들은 비싸다고 말하면 가이데. 말이 걸작이다. 물건을 모르면 값을 많이 주라고 하는 것이다.
 좋고 있는 가로등을 따라 시내에 들어와 석식을 마치고 관광 첫날의 일정을 마치였다.

○ 천단(天壇) 명(明) 청대에 황제가 하늘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풍년을 기원하던 곳이다. 명나라의 영락제가 세웠고 청의 건륭제가 개축했다. 고궁을 중심으로 일단(日壇). 월단(月壇). 천단(天壇). 지단(地壇)이 대칭을 이루고 있었다. 각각 이름을 해당하는 신들을 봉사하며 천단은 천신(天神)을 받든다. 천단의 둘레는 약6km로 고궁의 3배가량 되며 현재 공원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신년전(新年殿)은 황제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란다. 3층의 원형 대리석기단 위에 3층의 원형 건물이 서있는 모습인데 높이38km 직경30m이다. 기원전 안에 있는 황궁자(皇穹字)는 역대 황제의 위패를 든 곳인데 명나라 가정제(嘉靖帝)때 세워졌다. 이곳의 회음벽(回音壁)과 삼음석(三音石)이 유명하다 원구단(圓丘壇)은 천신에게 기원을 드리는 장소로 바깥은 4각 안쪽은 둥근 2중의 담장으로 둘려 싸인 3층의 원형 대리석단이었다.

 중충기둥 4개는 4계절을 뜻함이요. 그 다음 밖의 12개 기둥은 12개월을 가르침이요 제일 밖의 있는 12개 기둥은 12개 시진(時辰)을 가리키마고 한다.
 우리는 그 규모와 장식등에 대해 감탄할 뿐이었다. 남쪽 문으로 들어가 동쪽 문으로 나왔다.

○ 이화원(頤和園) 북경 서북쪽 16km 지점에 있는 큰 고원이다. 청대에는 여름 별궁으로 사용되었던 곳인데 총면적은 267ha에 이른다. 중국의 가장 큰 고대 황가 원림지대이다. 남쪽에 있는 공명호라는 인공연못이 전체면적3/4을 차지하고 있었다.

북쪽에는 공명호를 만들 때 파낸 흙으로 쌓아 조성했다는 만수산(萬壽山)이 있는데 주변은 모두 벽으로 둘러싸여있었다. 만수산 기슭에 펼쳐지는 누락. 전당. 화랑 다리는 모두 놓치기 아까운 볼거리였다.

 이화원은 금나라 때 행궁을 설치한 이래 역대 황제의 행궁이었단다. 청나라 건륭제 때 확장공사를 하였으나 1860년 영불군의 침략과 약탈로 인해 건물이 크게 파손되고 보불도 대부분 소실됐다. 그 후서 태후는 이곳을 지신의 은신처로 삼으려고 대규모 재건공사를 벌였으나 해군 경비300만 냥을 쏟아 부어 청의 멸망을 재촉하는 결과를 빚었다.

이화원의 건물들은 중국전통 건축의 명품으로 손꼽힌다. 그리고 공원의 식물들도 감상할만했다 호수의 물은 1년에 두 번씩 갈아 준단다.

○ 석방(石坊)은 서태후가 대리석으로 만든 석단(石丹)를 타고 보름날 달구경 떠날 때는 공원안의 촛불이 휘황한 가운데 궁녀들이 못에서 춤을 추며 흥을 돋았다. 물은 배를 띄울 수 있고 가라앉할수 있었다.
고로 백성은 이금을 섬길 수도 있고 뒤집힐 수도 있다. 그러나 한편 통치자들의 통치는 돌처럼 견고 했다.

○ 인수전(仁壽殿)은 서태후가 정무를 말아보던 곳인데 그가 쓰던 보좌와 필묵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 덕화전은 서태후를 위한 극장이었고 이락전(頤樂전) 대희루(大戱樓)는 3층으로 된 경극용 무대다 서태후는 경극을 즐겼는데 그가 직접 무대에 화장하고 출연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하루 저녁에 베푼 가무연에서 4만 냥의 돈을 썼으며 그를 따르는 악대들은 1200명이니 되었다고 한다.

○ 옥란당(玉灡堂)은 광서황제가 거쳐했던 곳이며 1898년의 무술 편범에 실패된 후 서태후에게 연금 당했던 곳이기도 하다.

○ 박수당은 서태후가 거처했던 곳이다.

○ 장랑(長廊)은 738m이고 273칸 이란 긴 복도 이었는데 세계에서 제일 긴 복도이기도 하다.

○ 인수전은 광세황제 서태후의 정치 황동구이며 외국 사신을 접대 한곳 이란다.
우리는 동문에서 여의 문으로 나왔으며 2일째 관광을 미치었다.

9월4일 북경에서 백두산(白頭山) 관광에 올랐다. 북경에서 항공기로 1시간 걸려 연길에 도착하면서 연변대학 지리계교수 장삼환(張三煥)와 백두산 행 버스에 탑승 포장도로와 비포장도로를 무려6시간 달려 백두산 입구에 도착하는 도중에 장 교수와 가이데. 장철(張鐵)의 여러 가지 명소에 대한설명과 장 교수님의 백두산의 식물 생태계에 대한이야기를 들으면서 눈으로 산야의 눈으로 산야의 경치를 보면서 머리에 자료를 담으면서 지루한 줄을 모르고 장백산 입에 도착한 것은 3시간이 되었다.

날씨가 화창하여 오늘은 천지를 구경하기에 좋은 날씨라 가이데. 가 말했다 먼저 갔던 관광객이 내려오면서 천지를 구경했다기에 잔뜩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70 모롱이를 돌아 올라가니 아니나 다를까 물안개와 바람이 불어 자갈이 날리고 사람이 날리. 정도로 세차게 불기시작 하였으며 현기증이나 가슴이 답답하였고 머리허리 멍하여 억지로 참으면서 기다려 볼라고. 하였으나 나와 일행은 아무것도 못 보았다.

아쉬움을 남기면서 오늘은 허무하게 되돌아오게 되었다. 어두워서 백두산 호텔에 투숙했다. 모처름이고 오래도록 백두산을 그리워했던 탓으로 다음날 또 오르기도 했다.

9월5일 잠이 깨어 무섭게 밖으로 나가 먼저 하늘을 쳐다보았다. 에이 또 흐렸다. 식전에 여러 가지 구경을 하고 사진을 촬영했다. 조작이 끝  나고 백두산에 오르기 전에 백두산 폭포로 갔다. 온천장을 지나 계곡을 오르는데 수해로 인해 길은 돌밭으로 변해있었다. 길옆에 물이   내려오는데 여러 갈래로 돌 사이로 흐르는 물과 돌이 어울리어 한북의 그림과 같았다.

길옆에 물이 나오는데 손을 넣었더니 살이 된 것 같았다. 그 옆에 달걀 몇 개를 넣어놓고 있었다. 익으면  파는 사람이었는데 이 달걀은 보통 물에 삶는 것과 달리 속부터 익어나 온다. 사먹어 보니 과연   노란 자는 완전히 익었는데 흰자가 들 익었다 세 개를 먹어도 모두 갈았다 70~80도의 수온이라 했다.

일기의 변동이 하도 심하여 폭포도 보이지 않았다. 30초도 안 되는 시간에 폭포의 물줄기가 보였다 사진 한번 찍는 사이에 또 물안개가 덮였다. 내려오는 길에 관광객 한 분이 풀밭에 소변을 보다가 감시원에게 발견되어 벌금을 중국 돈5원을 내었다고 하였다. 또 천지를 향하여 택시를 타고 올라갔으나 역시 천지의 물을 볼 수 없었다.

1년 365일 300일은 그의 비만 오는 날이라 하니 확실하게 천지를 못 보는 것이 단단한 일인 것 갈기도 하다 이 괴상한 백두산 천지는 옛날 우리 산이었는데 왜 중국 땅이 되었는가? 매국노가 따로 있나? 한스러운 사람들이였다. 그럼 백두산에 대해 몇 가지 소개해 보겠다.

 백두산의 병사봉의 지점은 동경128분37초 북위41도59분초에 놓인 곳이었고 높이는 2744m라고 적혀 있었다. 그러나 높이의 설도 많았다. 둘레에 용립하는 16개 봉우리들 중 그 병사봉을 비롯한 7개 봉우리가 북한에 놓이고.

병사봉에 버금가는 백운봉(2691m)과 천운봉등 9개 봉우리는 중국 땅에 소속되어 있다. (천지 둘레 16개봉 개념도 참조) 그 화구벽들은 평균 600m대로 솟구치게 하는 천지는 일명 용왕담(龍王潭)아라고도 일컬어졌다. 해발2155m에 놓여 남북 길이4.55km에 동서로는3.35km  최고수심은384m로 알려져 있다.

 산상호수 최저기온은 영하47.5도에 최고기온은 영상18도인데 최고풍속은 초속60m이지만 (나무뿌리를 뽑아 냍정도) 강수량은 제주도와 거의 맞먹는 연평균1400mmsk 되니 식물이 거기 14km 둘레에 200여종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천지의 형성 시기는 여태 확실하게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260만년전의 평균고도는 1500m 정도였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여러 번의 화산 폭발로 현재와 같이 되 것으로 추측한다.

 휴화산으로 하나 현재에도 82도 정도의 온천이 거기 솟아나고 있고 분기공(噴氣孔)에서는 간 혈적으로나마 가스가 분출되고 있으며 또 소규모의 지진 또는 산지사면의 붕괴 등이 이루어지고 있는 점을 보아 활화산이라고 볼 수 있다. 일조시간이 많고 쾌청일수와 강설일수의 비례는 대개 2대1 고도 한다.

 천지의 기점으로 해서 남쪽으로는 압록강 동쪽으로 두만강 서쪽으로 송화강이 흐르고 있다.
 고산 식물은 만병초. 들쪽(진달래)등이 있다하나 보지 못하고 아쉽게 내려 왔다.

 ○ 산림 자원 장백의 임해(林海)라고도 불리 우는 연변은 전국의 주요 목재 기지 중 하나다. 임지 면적은 34억7천15만 헥타르(자치주 총면적의81.3%)로 수림 지역은 전 차치주의 78.2%를 차지한다. 목재 총 축적량은 3억8천만 입방미터로서 인구 당 묵재 축적량은 190입방미터 이며 연간 목재 채벌 량은 약 300만 입방미터 이다.

 한편 120여 종의 식물 중 홍송. 백송 등등 30여종들이 모두 경제 수종이 라고 한다. 이것을 감미할 정도로 차간에서 보니 1천 고지에서 부터 인가가 보이고 초가집도 보이고 철로가 있었으며 검문소가 여러 곳이 보였다.

○ 농촌의 풍경 띄엄띄엄 있는 촌락은 주로 옥수수. 쌀. 콩이 주 농인 듯하여 간혹 조. 기장도 보였다. 초가와 스렛트 집이 보이고 한가로이 소가 풀을 뜯고 있었으며 담장과 지붕에 누렇게 호박과 박이 탐스럽게 보였다. 길까에 코스모스가 만발하여 바람에 한들거리는 풍경은 관광객들에게 상쾌한 기분을 주었다.

○ 지방 특물 연변에서 생산되는 지역 특산물로서는 경제적 가치가 있는 야생 식물만 1460여종 그중 약용 식물이 800여종이나 되다 고한다. 인삼. 녹용. 담비가족 등은 보배로 유명하다. 진귀한 야생 식물로는 인삼. 당삼. 향기. 등등이 있으며 송이버섯. 싸리버섯. 느타리버섯등 식용 버섯과 약용식물이 100여종이 자리고 있으며 야생 과일은 잣. 산포도. 산딸기등도 많았다.

과수원은 크고 작은 규모로 680여 곳이 있으며 그 총면적은 5333만 헥타르에 달한다. 연변의 사과 배(열매 모양은 사과 맛은 배) 밭은 아시아에서 둘째가는 큰 과수원이다.
 장백산(백두산)에서 야생 동물 250여종. 파충류. 양서류와 어류는 동물 300여종이 발견되었으며 경제적 가치를 높이고 있단다. 그 가운데서 검은돈의 가족은 대단히 귀하게 여기고 있다.

○ 목축업 초지가 많은 연변은 천연적 사료 공급지로서 목축업에 대단히 좋은 입지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특히 헥타르만 5만여 근의 풀을 매년 생산할 수 있기 때문에 소. 양. 토끼 등 초식동물을 사육하는데 최적지로나 하는 생각을 했다.

 광활한 산림 속의 가둑나무(떡갈나무)는 사슴과 누에의 먹이로 좋은 사료를 공급해 주고 있었으며 또한 피나무. 싸리나무 등 3000여종의 식물은 거의가 개화 시간이 길고 꿀을 많이 함유하고 있어 양봉업을 발전시키는 토대가 되기도 했다. 안내자부터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으면서 밤8시에 용정에 도착했다.

○ 용정과 대성중학교(大成中學校) 소화 말엽 악독한 일제하에 살길을 찾아 이불 보따리에 바가지 몇 개씩 말아 서울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다 못해 고개를 숙이고 있던 60여 년 전의 일이 눈에 선했다. 그 분들 중 이 용정 물을 마시고 그 당시 살길을 찾아갔으리라 생각하니 어찌 원통하지 않으래요.

그 때는 유일하게도 이 우물 밖에 없었고 민가도 없었단다. 주민들이(우리 동포) 보다 못해 버드나무에 뜨레박을 매어 달아 불편을 들어준 거룩한 동포애에 나도 고개가 숙으러졌다.

 대성중학교 이 학교는 문익환 목사를 비롯한 정치. 경제. 문학계 등의 훌륭한 인물을 배출한 유일한 학교이다. 여기서 일행은 기념하기 위하여 촬영 했다 카메라에 희미한 등불에 상을 넣었더니 떨어지던 불꽃처럼 한동안 카메라의 불꽃이 소란을 피웠다. 늦게야 저녁식후 호텔에 투숙했다

○ 9월6일 8시에 도문 행으로 떠났다. 버스 안으로 들어오는 산야의 약간 경사진 초원이 참으로 탐이 났다. 얼마를 가다가 소주잠(小舟岑)이란 통넬이 나타났다 길이 601m 너비7m이나 겨우 차가 비켜갈 정도였다. 이굴은 통과세가 있다.

버스는 10원 승용차는 5원을 내는데 매표소는 1개소가 있었다. 이 굴을 뚫은 경비는 국가에서 건설했는데 그 경비가 충당되면 통과 세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점은 건설사업 하는데 본받을 점이였다.

10시경에 도문 시에 도착했다 망원대에 올라가니 두만강에 놓인 다리 중간에 붉은 색과 파랑색으로 국경이 표시 되어 있었다. 옛날에 두만강은 배로 건너고 땜목 있었던 것으로 알았는데 지금은 물이 얕아 사람들이 건너다닐 수 있을 것 같았다.

물이 이렇게 적은가 안내자에게  물었더니 상류에서 하류로 내려오면서 전답을 개간하여 그 물을 이용한 타시라는 것이다. 망원경으로 본 함경북도 남양리를 보았다. A. P. T.가 몇 채 보였고  사람의 그림자라고는 볼 수가 없었다.

다리 양쪽 끝에 검문소가 있으나 북한은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안타가운 일은 북한 사람과 만나서 어떻게 지내는지 담화를 못한 점이다. 1시간 구경하고 이곳을 출발하여 영길 시에 들어서면서 백두산 곰 농장에 들렸다. 곰의 수는 500여 마리 그중 어떤 놈은 3단계에 올라가 재주를 부리는 놈이 있었고 한가로이 누어 잠시는 놈도 있었다.

그리고 서성 거라는 놈을 보고 경영자의 운영방안과 웅담이 약에 쓰이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백두산 호랑이가 줄 하나에 매어 땅에 누어있어서 사진을 촬영하였다. 1m 높이 대2개에 올라 있을 때 꼬리 뒤에서 사진을 촬영 하였는데 내 앞에 사람이 촬영하면서 엉덩이를 만지니 스르르 땅에 내려오고 말았다 1개의 식사로는 닭 2마리씩을 먹는다고 하였다.

영길 도서관에서 연변대학 장삼환(張三煥)교수로 부터 백두산에 대한 지대별 식물의 생태계에 대한 강의가 있었다. 중 식후 시대에 들어가 쇼핑을 하였다. 사회 질서가 잡히지 않아 물건 사는데 특별한 주의가 필요했다. 영길 비행장에서 북경 비행기에 밤 어두워서 도착한 후 호텔에서 하룻밤을 또 지냈다.

○ 9월7일 북해공원(北海公園) 8시에는 북해공원으로 향했다.
고궁의 서쪽에 공원이 있었는데 이 공원에서 북해라는 호수가 가장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요. 금. 원. 명. 청의 역대 황제들의 어원(御園)으로서 호수 중심에서 남쪽으로 흰 탑이 보였는데 이것이 고원의 상징이라고 했다.

호수 가운데다 섬을 만드는 일은 중국 고대신화에서 비롯됐다. 바다 건너 작은 섬을 연래(蓮來). 방장(方丈). 영주(瀛州)라는 세 산이 있었는데 그곳에 신선이 불사약을 갖고 있다가 전설에 따라 북해공원의 배치가 이루어 졌다는 것이다.

북해의 호수 중앙에 있는 커다란  섬 빈도(璸島) 남쪽 연못에는 여름이면 연꽃이 많이 핀다. 경도의 북쪽 호수 가에 있는 의란당(漪瀾堂)에는 청조 궁중요리의 전통을 이어받은 레스토랑이 있었다. 섬에서 바로 서북쪽으로 연못가에 오용정(五龍亭)이 있다. 퇴색해 불그스름한 철영벽(鐵影璧)이 도선장 바로 북쪽에 있었다.

그리고 이 철영벽의 오른쪽 안에 있는 구용벽(九龍璧)은 고궁내의 어느 것보다 아름다웠다. 고원 전문의 왼쪽에 단성(團城)이라는 언덕에 있었다. 그리고 석정 앞에는 700년이 된 흑옥(黑玉) 거북이가 있었다. 그 다음은 면적이 68㎡이고 봉래산이라는 의미를 지닌 경화도(璟花島)에 갔다 이곳에는 순치(順治)8년(기원1651년)에 건설된 라마탑이 라고도 하는 백탑이 있었다. 순치 황제가 각별히 라마교에 열중했으므로 북해고원에 백탑을 세웠단다.

○ 자금성(紫金城) 다음에는 자금성으로 갔다. 자금성은 20대 황제의 황궁(皇宮)의 명칭을 딴 것으로서 면적이 72만㎡나 되었다. 이 성을 옛날에는 자금성이라 불리었으나 현재는 고궁박물관(故宮博物館)으로 개칭을 했단다.

 외조에는 태화문. 태화전. 중화전. 보화전등의 있고 내조에는 건천문. 건청궁. 교태전. 건녕궁 이라는 이름을 가진 몇 개의 궁이 있었다.

△태화전은 매년 원단(1월1일). 동지(冬至) 만수(萬壽)등 3개의 건물이 있었고 이곳에 큰 명절 때 국가의 큰 경축의식을 거행하는데 황제가 어전에서 하례를 받았다고 했다. 

△중화전은 태조 때 잠시 쉬는 곳으로 사용되었고 보화전은 과거시험과 최고층의 전시(殿試)를 하는 곳이었단다. 그리고 전청국은  명천 주조 대 황제의 집궁인 동시에 평소 정사(정사)를 처리하는 곳이며 황제가 죽은 후에 영구를 놓는 곳이기도 했단다. 그리고 정대광명(正大光明) 액자는 태자의 이름을 비밀조사를 쓰는 방식으로 써서 금합에 넣은 후 바로 그 비밀조사를 꺼내어 태자를 확인하는 방법으로 태자를 책봉했단다. 그 다음 교태전은 옥새를 두던 곳이며 황후 생일잔치를 하던 곳이기도 하다.

△건녕궁은 황제와 황후가 결혼하여 첫날부터 사흘 밤을 지내던 곳이  넣으며 어화원은 황제의 정원이었단다. 그리고 그 부근의 인조산은 9월9일 동일(動日) 초명(草明) 해돋이를 보기 위한 곳이기도 했단다.

○ 북경중의약대학(北京醫藥大學) 이 학교는 오래된 건물로 전기불은 켜져 있어도 어디가 컴컴한 기분이 났다. 그 곳에서 김정옥교수는 친절하게 안내하면서 약용식물에 대한 설명을 해 주었다. 약의 효능에 대해 약 장차 모양으로 선전 했다. 무료의 진찰을 하는데 짚고 침을 놓아 주는데 침 값을 받았다.

의술과 침술에 있어서 사람을 진단할 때 국부의 반응을 보는 것이 아니라 거시적인 관점에서 본다고 설명을 했다. 질병은 정지상태가 아니고 동태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치료방법에 있어서도 약제의 정신적인 반응은 중요시하기 때문에 인체 내의 면역력을 증강하여 자기조절능력을 향상시키며 인체 내부 환경을 방법을 주로 사용하고 했다.
중국에서는 중의학의 지위를 헌법상으로 보장하고 있었으며 국가적으로 지원까지 하고 있다고 했다.

○ 천안문(天安門) 중국의 상징이자 북경의 얼굴인 천안문은 명나라 영악(永樂)15년(1417)에 세워졌는데 당시는 영천문(永天門)이라고 했다. 그 후 청나라 순치(順治)8년(1651)에 개축돼 현재의 모습을 잦추었고 이름도 천안문으로 고쳤다고 한다.

천안문은 고궁의 남문이지만 실제로 하나의 궁전이었다고 하는 편이 적절하다. 중국 고대 건축양식과 재료 기술 등이 이 건물에 집약돼 있다고 해도 관원이 아니다. 문 앞에는 도랑이 있고 석조다리 5개가 놓여 있으며 해도 양쪽으로는 돌기둥이서 있다.
옛날 이 문을 황성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금수교(金水橋) 앞에서 무사들이 창칼을 들고 지켰다. 천안문 성루 위에는 중화인민공화국 국장(國章)이 장식돼 있고 성루5개의 문 중앙에는 모택동주석의 사진이 걸려 있다.

명 청대에는 황제가 조칙을 발표한 때 이 문에서 의식을 거행했다. 마치 이를 따르듯 중화인민공화국 성립도 1949년 10월 1일 이 성루에서 모택동에 의해 선포됐다. 경축일이나 큰 축제가 있으면 누상에 8개의 등이 내 걸리고 밤이면 아름다운 전광식으로 빛난다. 관광객도 계단을 통해 성루에 오를 수 있는데 요금은 10원이다.

○ 천안문광장(天安門廣場) 천안문에서 정양문(正陽門)에 이르는 남북88cm 인민대회당에서 중국역사박물과에 이르는 도서 500m의 세계 최대의 광장이다. 총면적은 40ha로 100만 명이 모일 수 있다. 1949년 건국당시는 지금처럼 넓지 않았지만 58~59년 인민영웅기념비. 인민대회당. 혁명박물관. 역사박물관등이 낙성되고 77년 모택동 기념관을 완성되면서 현재와 같은 ㄷ자형의 외관을 잦추었다.

○ 인민영웅기념비(人民英雄紀念碑) 천안문광장 남쪽에 우뚝서있는 높이 32.29m의 백옥비 이다. 1958년5월1일에 완성된 이 비석은 1840년 아편전쟁 이래 제국주의 열강의 중국침략에 대항하여 싸워온 사람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비석전면에는 모택동이 쓴 인민영웅중불후(人民英雄重不朽)란 글귀가 새겨져 있고 뒤 면에는 주은래의 글자의 적혀 있었다. 1989년 6월 4일 천안문  사태당시 시위 학생들의 지도부가 이곳을 중심으로 활약 했었다.

○ 모주석기념당(毛主席紀念堂) 이 기념 당은 모택동 서기 1주년에 세운 건물로 천안문광장 남쪽에 있었다. 내부는 남쪽과 북쪽의 방 예배의 방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북쪽 방에는 모택동 좌상이 있고 예배의 방에는 모택동 시신이 수정관에 안치 돼있었다.

마치 잠자고 있는 듯한 모택동을 보기 위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항상 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천안문광장(天安門廣場) 서쪽에 있는 인민대회당은 다른 나라의 국회의사당에 해당하는 곳으로서 1959년 가을에 완성됐단다. 이 건물은 동서 206m에 이르는 넓은 부지 위에 세운 중국 최대의 건물이다.

회당의 중심에 있는 홀은 1층 좌석이 3천7백석 2층 3천3백석 3층이 2천5백20석으로 모두 1만석에 가까운 좌석이 마련돼 있고 정면무대는 3백 명이 동시에 입장할 수 있을 정도로 넓다. 전 국민 대표대회 회장이며 당이나 정부에서 개최하는 대집회 회의장으로 자주 쓰인단다.

또 대회장 북쪽에는 7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연회장이 마련돼 있었다. 중국식 만찬이라면 5천여 명을 칵테일파티라면 1만 명이 동시에 참가할 수 있단다. 참으로 거대했다. 다음은 중국역사박물관(中國歷史博物館)과 혁명박물관(革命博物館)으로 발길을 옮겼다.

천안문광장 동쪽에 서있는 이 건물은 왼쪽이 역사박물관 오른쪽이 혁명박물관 이였다. 역사박물관은 원시사회관. 노예사회관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혁명박물관은 1840년 아편전쟁에서 1919년 5월4일 운동에 이르기까지의 구민주주의 혁명과 1919년에서 1949년에 이르는 신민주주의  두 시기를 나뉘어져 있었다.

천안문을 보고 북경 시내의 한 백화점에서 쇼핑을 했다. 그런데 일행 중 대부분이 물건 값이 비싼 곳을 왔다면서 불평이 많았다. 나는 거리 실정을 조사 해보았다. 이 이야기는 중국의 이모저모에서 소개하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생략한다.

○ 9월8일 아침 7시에 북경에서 청진공항으로 향했다. 버스로 2시간 거리로서 차 속에서 시원한 들판을 바라보면서 밭의 작물과 특이한 수목 건축물 등을 보았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농업에 대한 것을 조사 못한 것이 아쉬웠다. 우리는 이날 10시 천진에서 출발한 비행기는 12시에 서울에 도착하여 김포 비행장에서 우리는 각자 행동을 하였다.

중국의 이모저모 중국인 인구 정책에서 특색이 있었다. 이 제도는 중국인은 가구당 한사람을 조선족은 2명의 출산을 허용하고 있었으며 이것을 실행하기 위하여 늦게 결혼하기 늦게 출산하기 적게 낳고 우수한 악이 키우기든 결혼식 때 결혼을  순서에 넣고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가정에 포스터를 계시하는 등이며 출생신고는 꼭 해야 한다. 교육문제와 거주문제가 따르기 때문 어란다.

결혼을 해도 한 곳에서 살 수 있는 곳은 농촌. 중 도시. 대도시 별로 지정된 곳에서만 같이 살 수 있고 지정된 곳과 다르면 부부가 같이 살수 없다는 것이다. 결혼식장이 없이 가정 또는 식당에서 결혼예식을 거행 한다. 인구가 많은  국가로서 이에 알맞게 토지도 많으나 밀을 미국에서 수입한다니 참으로 인구문제가 심각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다음은 교육행정으로서 소학학교는 6년제 초급중학은 3년제이고 의무교육으로 되어 있었고 고급 중학도 3년제 대학은 4년제에서 6년제까지가 있다. 그리고 중국인  학교와 조선족 학교로 구분하고 있다.

건설 분야에서는 육교는 대체로 반월형으로서 계단이 2단으로 되어있어 차가 통하는데 아무른 지장이 없었다. 그리고 조그마한 굴을 뚫어도 국가에서 경비를 부담하고 버스 택시에 통과 세를 받고 있었다. 국가에서 부담한 비용이 다 중단되면 통과 세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국민의 세금으로 충당하는 것보다 국민생활을 보장하는데 좋은 방법의 하나가 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나라의 교통행정을 보면 길은 인도와 차도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옛날집이 밀집된 곳은 4차선 도로로서 차가 다니는 곳은 2차선만 이용하고 양쪽은 자전거 마차 오토바이 사람들이 통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횡단보도가 극히 적었다. 그래서 차만 섰다하면 그 사이로 많은 사람이 유유히  건너가고 있었다. 중국 사람은 만만디라 하더니 운전기사들이 그 대표적이었다. 우리나라 운전기사들이 본받을 만했다. 그리고 네거리에 횡단보도가 극히 드물었는데 이것은 보행자 위주가 아닌가 여겨졌다. 이는 도로의 구실이 자동차의 절대적 위로 된 우리나라와는 상반된 일이었다.

사람이 최단거리에서 건너가야할 일인데 네거리 중안에 여기저기 길을 만들어 중간에서 추위와 더위에도 기다려야 하도록 하고 도로건설에 많은 세금을 들여 국가경제를 손상하는 우리의 교통행정과 매우 달랐다. 영길에서 백두산까지 가는데 6시간이나 걸리었는데 거리의가 비포장 도로였다.

이 도로들을 성급하게 포장을 하지 않는 것은 국가경제 개발에 역점을 둔 정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짐을 실고 다니는 자전거가 있었는데 북경에서는 사람이 앞에 타고 짐은 뒤에 실고가고 있었다. 영길에서 짐은 앞에 싣고 사람이 자전거를 타고 밀다 집이 가고 있었다. 이것은 사회질서가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은 사회미화 운동과 노인복지문제 공원 명승지를 가도 모두가 깨끗했다. 담배를 피워서 안 되는 곳에서 흡연을 해도 그렇고 꽁초를 버려도 벌금을 5원을 내야하고 영수증을 주었다. 화장실에 들어가려면 중국 돈10~3원까지 있어야 했고 그 기에는 노인이 있었다.

이것은 노인을 우대한 것이기도 하다. 가까운 일본만 보더라도 가정에서 가내 공업을 할 수 있게 하고 있었다. 일거리가 없어 화토놀이나 술타령을 하고 허송세월을 보내고 고작 노인들을 위해 경노 당을 지어주고 노인을 우대 한다는 정책과는 매우 달랐다.

나이가 든 분들이 국가의 경제면과 건강문제나 근면성을 청소년에게 보여주는 것은 매우 생산적이고 현실적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다음에는 농촌으로 발길을 옮겼다. 자세한 것은 몰라도 논에 모를 심는데 옛날에는 흩어 뿌리를 하였다는데 지금은 정조식 모내기를 하고 있었으며 낫으로 벼를 베는 데가 많았다.

밭작물은 주로 콩 옥수수 등이고 목화를 심는 곳도 간혹 보였다. 도시근교에는 조선족도 채소농사를 많이 하고 있었으며 가족으로는 한우가 많이 보였다. 흔히들 중국 사람들은 장사에 뛰어나다고 한다.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화교들을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중국인들은 물건을  파는 데는 권하기 보다는 오히려 요구하는 편이었다. 백두산 근처에서만 장사꾼들이 따라다니며 사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물건을 구경만하고만 있어도 달라붙었다. 그래서 안사고는 못 견딜 지경 이었다.

만약 한 가지라도 사면 옆에 있던 사람이 매어 달린다. 참으로 귀찮은 존재였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에는 우리에는 우리 조선족이 많은 영길에 갔다. 이곳에는 호화찬란치는 못해도 한글로 쓰거나 한글과 한문을 병행한 간판이 눈에 많이 띄었다. 역시 조선족이 70%이상이 살고 있다 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 같았고 이국땅에서 우리글을 보는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었다.

다음은 노인 복지 문제에 대해 알자 보았다. 사람은 누구나가 늙기 마련이다. 그런데 보기 딱한 일들이 보였다. 아침 일찍 부터 쓰레기장을 뒤지는 노인들이 보였다. 왜 그러는지 가이드에게 물었더니 생활수단의 한 단면 아란다 자식에게 버림 받은 노인들이 외토 리가 되어 그렇게 살고 있다니 옛날 맹자와 공자 탄생했던 유고 본산지로서 이럴 수가 있을까하는 생각이 미쳤다.

나라에 충성하고 산 이분들이지만 공산주의 정책의 부산물로 생긴 현상들이라니 세상사가 허무함을 느끼게 했다. 다음은 그림을 파는 가게로 갔다. 거리와 매점에 가면 흔히 액자용 그림 및 병풍용 그림 또는 서해 족자가 분홍 적흑색 푸른 색등 여러 가지 색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그림을 그렸는데 꽃의 색에 따라 잎의 모양이 달라야 하는데 대체로 붉은 색 목단의 잎으로 통일해서 그려져 있었다.

내가 봐서는 예술성의 가치가 적은 것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오락으로는 마작을 위시하여 장기. 바둑 등이 그에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바둑은 우리나라는 말발이 가는 길이 달랐다. 그리고 고궁이나 공원이나 그늘에는 남여(노인)들이 여럿이 모여 사교댄스를 배우고 있었는데 모두가 기초를 베우는 정도였다 이것 또한 망조의 길을 걷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은 가옥에 대해 알아본다. 조선족의 가옥은 보통 나무를 재료로 짓고 사면을 경사지게 한 다음 예전엔 볏짚이나 조짚을 사용했으나 이제는 기와를 얹는다. 살림집은 보통 세 칸으로 지어지는데 가운데 방이 제일 크다. 가운데 방의 2/3되는 곳에는 구들이 놓이고 1/3은 부엌으로 쓰인다.

큰 방은 다리 두 칸으로 나뉘자 양지쪽은 사랑방으로 쓰고 북향 쪽을 자녀들의 침실로 사용한다. 손님이 오면 남자 손님은 사랑방으로 여자 손님은 부엌방으로 드나든다고 했다. 그리고 파출소에 대해 알아보니 조그만 구역마다 설치되어 있고 순찰도 돌지만 군인과 복장이 비슷해 관광객들이 구분하기 쉽지 않다. 구별 방법은 모자의 두른 색 살과 칼라 부분의 색깔을 보고 판별할 수 있다.

 경찰: 모자에 노랑 두 줄 붉은 칼라
 육군: 모자에 붉은 띠. 붉은 견장
 해군: 모자에 검은 띠. 검은 견장
 공군: 모자에 푸른 띠. 푸른 견장 -끝-               

저작권자 © 울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