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명룡 울진신문 서울지사장
임명룡 울진신문 서울지사장

꽤 오래전 일이다. 경기도 파주시 문화원에서 저녁 강연을 한 적이 있다. 좀 늦게 강의실 문을 노크하며 들어오시는 분이 모내기를 마치고 오느라 늦었다며 죄송하다고 했다. 말끔한 양복차림이라 내 딴에 겸사로 댁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오시느라 늦으셨군요.”했더니, “논에서 바로 오는 겁니다. 요새는 양복입고 농사짓습니다. 기계가 다 하는데요 뭐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참으로 격세를 실감했다.

내가 기억하는 모내기철, 옛날 아버지들의 노동은 실로 대단했다. 저녁이면 고된 논일과 술에 지쳐서 밥상을 물리자마자 곯아떨어지셨다. 그러다 새벽녘에 잠에서 깨어나면 끙끙 앓는 소리가 옆방까지 들렸다. 체격이 비교적 건장한 분이셨는데도 그랬다. 모내기철은 그렇게 노동의 강도가 임계점을 넘나들었다. 아마 일 년 내내 그랬다면 논[]이라는 경작형태는 진작 없어졌을 지도 모른다.

우리가 모내기를 떠올리면 까마득한 옛날부터 그렇게 해온 것으로 연상되지만, 실제로 모내기가 보편적으로 실시된 지는 300년이 채 못 된다. 영조 36(1760) 비변사에서 올라온 장계에 이런 내용이 있다. “나라에서 이앙(移秧) 금지령이 지엄한데도 근래에 모내기가 두루 퍼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해마다 4~5월에 날씨가 가물면, 제때에 모내기를 못해 한 해 농사를 묵혀버리는 농토가 허다합니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각 고을 수령이 일일이 직접 조사하여 물을 충분히 끌어다 댈 곳이 있는 논은 모내기를 하되, 그 밖의 논밭은 모조리 마른 흙에 볍씨를 뿌려[乾播] 심도록 엄중히 분부하여 따르게 하소서이런 상소는 조선 말기 헌종 4(1828)까지 이어져 모내기 농법을 지양시켰다. 그러나 농민들은 산중턱에 덤벙[]을 파서 빗물을 받더라도 기어코 무논[水畓]에 집착하였다. 왜 그랬을까.

저명한 거시 경제학자 앵거스 매디슨의 통계를 보면 1600년에서 1800년 사이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가 차지하는 세계경제비중은 30%를 넘어 무려 40%에 육박했다. 이 수치는 지리적 넓이와 인구 비율보다 훨씬 높은 것이다. 몽골제국 성립으로 세계시장이 확대된 까닭이기도 하지만, 동아시아 경제 비약의 밑바탕은 논의 혁명이었다. 물을 담은 논에서 벼농사를 짓는[水稻作] 방법으로 토지의 한계생산성을 지극히 높였던 것이다. 습윤율이 낮은 서구의 토양에서는 노동력을 높인다고 해도 생산성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때문에 넓은 경지와 경영 규모가 대형화해왔다. 반면 동아시아의 습윤지역은 토지에 대해 노동력을 투입하면 할수록 토지생산성이 높아진다. 이앙농법 출현으로 쌀의 생산량이 급격히 높아졌고, 오늘날과 같이 높은 인구밀도가 실현된 것이다. 그러니 비록 가뭄으로 모내기를 실패하는 한이 있더라도 무논 농사에 올인했던 것이다.

사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모내기 방식의 논농사는 엄청나게 힘이 든다. 우선 비탈 밭을 논으로 만드는 것부터 극한노동이다. 평지로 만들기 위해 바윗돌로 석축을 쌓고, 둑을 만들어 물을 채워 늪이 될 때까지 수도 없이 돌을 고르고 갈아엎어야만 논이 된다. 또 가뭄에도 논에 물이 마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보()를 만들고 수로까지 갖추어야 한다. 모내기철 써레질은 또 어떤가. 진흙으로 굳어진 논바닥을 쟁기로 갈아엎는 것도 힘들지만, 정강이까지 푹푹 빠지는 논뻘을 곤죽이 되도록 써레질할 때는 황소도 등짝에 땀이 배일 정도다. 품앗이로 하는 일이라 마을 모내기가 다 끝날 때까지 하루도 쉬지 못하고 극한노동을 견뎌야만 했다. 그런 노동은 건장한 남자만이 감당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남성 중심 사회가 형성된 것이다. 더불어 소가 귀해졌고 논이 귀해졌다.

그러나 논일은 모내기가 7할이다. 모를 일정한 간격으로 심었더니 김매기가 일이 아닐 정도로 수월했다. 벼를 수확할 때까지 가끔 논물만 관리하면 그만이다. 양잠을 할 여유가 생기고 옷감을 짜고 생필품을 만들 시간이 남는 거였다. 가족영농이 가능해졌고 12마지기 자영농만 되면 제 식구 건사가 무난하니, 대지주나 마름에 굽신거릴 필요가 없었다. 자영업자 수가 유난히 많은 까닭도 사실은 논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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