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정리 김용수
온정리 김용수

내 정서의 고향은 늘 어머니였다. 나는 바람 잘날 없는 아이였다 어머니는 그런 나를 나이 들어 회상하실 때, '벼랑 끝에 세워둔 아이' 라고 하셨다.

공부 잘하고 착한 자녀들 숲에서, 나는 툭하면 사고를 쳐서 어머니를 슬프게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나에게 단 한번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니가 제일 씩씩하고 사내답고 인정 많다" 시며, 있지도 않은 장점을 골라내어 나를 기죽지 않게 했다.

어머니는 나에게 틈만 나면 곱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해주셨다. 아니 아마 이 세상 모든 이 들의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고운 이야기를 해 주셨을 거다.

우리는 시장 통에 살았지만, 내 기억으로는 어머니는 한 번도 쌍소리를 하신 적이 없었으며, 자식들에게도 늘 그랬다. 아마도 억세고 호승심 강한 내가 이 나마라도 순화되고, 정서적 안정을 찾은 것은 그런 어머니의 영향이 많았을 거다.

지난 여름 끝자락에 고향을 찾은 시인 Y가 몇 년 전 새로 생긴 직산, 후포 간의 해안도로를 가고싶어 해, 나는 바쁜 일상을 두고 그와 동행한 H와 함께 해안도로를 드라이브했다.

거일1(개바우)를 지나 거일2(큰돈바)로 향하며 나는 착하고 여린 이 시인을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할까 생각하던 중오래 전 어머니로 부터 전해들은 돌 비석 이야기를 해 주었다.

일제 강점기 식민지 청년과 일본인 여선생의 순결한 사랑 이야기. 그 아름다운 사랑을 안고 해당화 핀 바닷가에서 멀리 동해바다의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던 돌비석. 고등학교 때인가, 어머니가 해 주신 이야기를 쫓아서 그 돌비석을 찾아 천천히 차를 몰았다. 30년도 더 지난 기억을 더듬으며...

돌비석은 해안도로 바로 옆 그 곳에  폐허가 되어 있었다. 나는 반가움과 놀라움에 차를 대고 그곳에 서서 떨리듯 비석을 어루만졌다. 어머니로부터 전해들은 못 다한 순결한 사랑 이야기를 반추하며...

식민지 청년을 사랑한, 지고 지순한 일본인 여선생과 일본 유학 중 요절한 법학도의 이야기와 망망대해 먼 수평선을 바라보고 서 있는 이끼 낀 초라한 돌비석이, 맘 여린 Y를 슬프게 한 모양이었다.

그녀의 사슴 같은 눈에는 물기가 서려 있는 듯 했다. 사랑 이야기도 좋지만 여린, 하얀 찔레 꽃 같은 시인을 슬프게 해선 안되지... 나는 이내 먹는 이야기로 대화를 전환시켰다.

"우리 싱싱한 회에다 소주 한잔해야지" 그녀는 술 근처에도 못 가지만, 술을 마셔야 이야기가 술술 나오는 나를 배려했다.

 며칠 후 내 우편함에 그녀의 글이 왔다. 제목은 '純愛碑' 그 사랑이야기를 글로 보내라는 것이다. 백일장에서 시제를 주는 출제관 처럼 그녀는 늘 나에게 글 쓰기를 종용한다.

오늘 어머니를 찾아가서 다짜고짜 "어무이요! 그 조선인 대학생 사랑한 일본 여선생"이라고 말문을 여니, 어머니는 삼십년도 넘게 전에 나에게 이야기 한 것을 까마득히 잊어버리시고, "니가 우째 아노 '다까하시 오시이에' 선생님을" 하신다.

어머니의 구술은 시작되고, 나는 답안지를 든 학생처럼 메모한다. 그 순결하고 슬픈 사랑 이야기는 다시 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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