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리와 혹리"

 

김진문 시인
김진문 시인

이산해 는 조선 선조 대에 영의정을 두 번이나 역임한 인물이다. 그는 임진왜란 시 선조의 의주 파천 책임론에서 정철 등 서인탄핵을 받아 평해 에 유배를 왔다. 그는 3(15921595)간 유배 생활에서 써 두었던 시와 산문을 묶어 아계유고(기성록)를 남겼다. 순리전(循吏傳)도 그 하나다. 순리전은 인물평전으로 당시 평해 군수를 칭송하는 글이다. 이산해 는 순리전 에서 유능한 관리(循吏)와 무능한 관리(酷吏)의 행태를 거론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무능한 관리의 행태다.

첫째 비록 학문이 뛰어난 선비라도 관리로서 재능이 모자라 번다한 업무처리에 서툰 자가 있고, 사정에 어둡고 절목(節目)에 소홀한 이도 있다. 둘째 기강을 너무 풀어 놓았다가 아전들의 농간에 놀아나고, 정사가 지나치게 번쇄(燔碎)한 나머지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이도 있다. 셋째 아무 식견도 없이 자신을 살찌울 줄만 알고 백성을 돌보는 일이 어떤 것인지 모르는 이도 있다. 넷째 탐욕에 빠져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고, 녹록하게 자리를 잃을까 걱정하여 구차히 죄책을 면하기에 급급한 이도 있다. 다섯째 모질고 가혹한 형벌로 크게 인심을 잃는 이도 있다.

다음으로 그의 순리론이다. 이산해는 군수 이름은 거론하지 않았다. 문헌자료에 따르면 당시 평해 군수는 김덕관과 윤설 이었다. 둘 다 무과 출신이다. 필자의 견해로는 윤설 로 보인다. 김덕관은 1591415일 도임해 15931125일 사망했다. 그 후임인 윤설 은 1594(선조27)1월에 도임해 15992월 종2품직인 함경도 북청의 남병사로 초배(超拜)되었다. 초배는 관직에서 서열을 뛰어넘어 발탁·영전한 것을 말한다. 남병사는 요즘으로 치면 함경도 북방지역의 육군과 해군을 겸한 총사령관격의 관직이다. 이산해 는 그를 유능한 관리의 모범으로 다음과 같이 칭송했다.

첫째 정사를 폄에 있어서 청렴하고 신중한 몸가짐으로 했다. 그 예로 관아에서 받는 녹이 40섬인데 이를 절감하여 6할을 반환하였다. 둘째 자신이 조석으로 먹는 음식이라고는 그저 나물국과 변변찮은 소찬뿐이었다. 셋째 민원과 송사를 처리함에 판단과 재결이 신속하기가 마치 흐르는 물과 같았다. 넷째 파종할 때면 들판으로 나가서 부지런한 사람을 권장하고, 게으른 사람을 면려하였다. 다섯째 온화한 태도로 아랫사람들을 다스렸다. 여섯째 겸손함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무인이니, 그저 탐관오리나 되지 않으면 다행이다. 훌륭한 선정(善政)을 베푸는 것이라면 나로서는 불가능하다.

조선왕조 시대 목민관과 민주 지방자치 시대 지도자의 역할과 평가는 분명히 다를 수 있다. 지금은 21세기 참여민주주의 시대다. 하지만 그 근본은 다를 바 없다. 따라서 이산해의 순리전은 오늘날 공직자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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