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의 출현과 정담 장군”

김진문 시인
김진문 시인

필자는 얼마 전 울진 소극장에서 영화 한산 용의 출현을 보았다. 용의 출현을 거북선의 출현으로 이미 짐작했지만, 과연 일본군선을 격파하는 거북선의 맹활약 장면은 흥미진진하고 박진감이 흘러넘쳤다. 일본 기록에도 거북선의 출현을 귀신을 본 듯하였다니, 전의를 상실케 할 만큼 공포와 두려움을 주기에 충분했다.

이순신 장군의 치밀한 학익진(鶴翼陣)전술도 인상적이다. 이 전술은 학이 나래를 펼치듯 진영을 구축하여 적군을 포위하듯 가운데에 몰아넣어 섬멸하는 작전이다. 전술, 거북선의 맹활약, 조선 수군의 용맹으로 일본군의 기세를 꺾고, 해상전투에서 압도적 승리를 가져왔다.

한산2014명량에 이은 김한민 감독의 이순신 3부작 중 두 번째 영화다. 올 겨울 노량(죽음의 바다)이라는 작품이 개봉될 예정이라 더욱 기대가 크다. 이로써 김 감독의 이순신 장군 3대 해상 대첩을 그린 작품 완성이 되는 것이다.

영화 한산은 이순신 장군이 활약한 해상전투를 주로 다루지만, 육상에서 벌어진 웅치전투도 영화의 중요한 부분이다. 웅치(곰티재)는 전라도 완주와 전주를 잇는 고개다. 159278일 새벽, 일본군은 전주를 점령하기 위해 웅치에 집결했다. 조선군과 일본군은 이곳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싸움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시산혈해(屍山血海)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초기 한산도대첩의 영웅이 이순신 장군이었다면, 육상 대첩의 영웅은 웅치를 지켜낸 정담 장군 (15481592) 이었다. 정담 장군은 관군, 의병과 함께 웅치에서 장렬하게 전사했다. 적군인 일본군 역시 정담의 충절에 감명받아, 전투 후 전사한 조선군을 수습해 길가에 큰 무덤을 만들고, 그 위에 조선국의 충신과 의사의 간담을 조상하노라(弔朝鮮國忠肝義膽)는 팻말을 세워 조선 군사의 넋을 위로했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학계에서는 웅치전투를 임진왜란 초기 최대 위기 상황에서 조선군이 육상에서 승리한 최초의 전투로 평가하고 있다. 웅치에서 비록 조선군이 퇴각했지만, 이곳에서 물러난 뒤 전주성 방어에 성공했기 때문에 곡창지대인 호남을 지켜내고 병력과 식량 등을 확보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웅치전투와 뒤이은 전주성 방어 성공으로, 일본군의 서해 진출을 막아내고 후일을 도모할 여유를 갖게 됐다.

백사 이항복의 호남이 없었더라면 국가도 없다’ (『若無湖南 是無國家』) 라는 말은, 웅치전투와 전주성 방어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항복은 또 나의 장인 권율 장군께서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세상 사람들이 내가 주도한 행주싸움의 공이 크다고 하나, 사실은 전라도 웅치싸움을 주도한 정담이 가장 크고, 다음은 행주싸움이다. 그가 1,000명도 안 되는 약한 군사를 데리고 10배가 넘는 대적을 맞아 잘 싸우다 죽었고, 그러므로 호남이 보전되었으니 어찌 그 공이 적다고 하겠는가!”라며 정담의 공을 높이 평가했다.

새삼 울진 출신인 정담 장군을 소개한다. 그는 기성 사동리에서 태어나서 현 해월 종택에서 자라났다. 정담 장군의 아버지 정창국은 사위 황응징 (황해월 선생의 아버지) 에게 사동리 고택을 물려주고, 영덕 창수로 이주했다. 정담은 어린 시절, 매형인 황응징 선생에게서 배웠고, 정담 장군의 조카가 바로 해월 선생이다. (황해월 선생 후손 황의석 선생 증언)

후일 정담은 무과에 급제하여 무인의 길을 걸었다. 임진왜란 당시 정담은 호남방어의 중책을 띄고 김제 군수로 부임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웅치전투를 치르고 전사한 것이다. 임진왜란 초기, 비겁한 임금 선조가 한양도성을 버리고 도망간 상황에서 조선 관군과 의병들이 흘린 피가 국가 보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더구나 그 가운데 울진 출신의 정담 장군의 공이 우뚝하였으니 역사적으로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이번에 영화 한산 - 용의 출현이 상영되면서 웅치전투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웅치 소재지인 전북 완주군은 웅치 전적지 일대를 국가사적으로 지정하는 작업에 나섰다고 한다. 반면 정담 장군의 출생지인 울진 기성 사동리에는 7번 국도 남쪽 들머리에 그의 유허비가 쓸쓸히 서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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