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한 기 박사

그동안 아내도 잘 참아주었다. 그리고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이날까지 38년간 한 대학에 머물며 할머니의 속을 무던히도 태우던 그 소년은 국문학과에서 따로 제가 좋아하던 연극영화과를 창설하고 학과장, 학장, 박물관장, 또 학장, 대학원장을 역임하며, 96년 말로써 정년을 맞이한다.

그의 삼남매도 무럭무럭 잘 자라 주었다. 그리고 큰아이는 그가 못 이룬 의사가 되고, 막내는 아내가 소원하던 판사가 되었다. 그러나 이 삼남매 모두가 박사학위를 땃고 딸과 아들이 또한 대학교수가 되는 것을 아내는 보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났다.

막내를 배던 해, 만삭된 그 무거운 몸으로 벽돌을 날라 집을 짓고, 평생 손에서 물기가 말라 본 적 없던 아내는 눈을 감았다.
살아서는 후한 천사이기도 하였다. 시장 아주머니들은 정초면 으레 계란 한 꾸러미를 그의 집에 선사하곤 하였다.

그는 후덕했다. 시장에선 절대로 물건 값을 깍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날 과일과 푸성귀 장사, 생선 장사들에겐 더욱 그러했다. 주는 대로 받아오고 한다며 그들에 건네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그들을 감동하게 하였음이다. 이렇게 오는 사람들은 그보다 잘 못사는 생선장사 아주머니거나 하루 벌어 하루 먹는 푸성귀 장사들이었다. 그들의 고마운 정성, 이 달걀 한 꾸러미는 천금만금의 선물보다 값있고 소중한 것이었다.

어릴 때  짓궂던 그 소년과 그의 자식 삼남매는 그런 아내와 어머니를 여의었다. 그것도 막내가 스물넷 이른 나이에 판사로 임관한 해 몸져눕던 아내는 암이 라는 사형선고를 받고 이듬해 이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원통하고 애달프다. 그는 생전, 죽어서 한 마리 새가 되기를 소망했고, 그래서 이 세상 저 세상 좋은 곳 찾아 날아다니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다. 그래서 지금 그의 무덤 (북면 소곡리) 앞 묘비에는 하늘 새 한 마리를 새겨서 그의 혼을 기리고 있다.

그는 마누라를 여의고도 아이들과 제자들의 성화에 못 이겨 그의 회갑연에서 이런 말을 하였다. “ 내 아내를 여읜 것 말고는, 신이 이 세상 모든 것을 나에게 준 데 대하여 감사 할 뿐이다. 신이 나에게 모든 것들을 주듯, 나도 모든 것을 이 세상을 위해 바치고 떠나고 싶다.”
소년은 살아온 날을 경험 삼아 자식들에겐 또 어떤 말을 남길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복(福)을 아끼고 숨겨 남의 부러움과 입초시에 오르지 말며, 절은 아끼지를 말라 (惜福不惜拜)”

어려서의 소년은 그때의 모험심이 다시 살아났던 것일까? 항시 위험과 첨단에 서길 좋아했던 그는 60이 넘어서도 모험심은 되살아나고 있다.
남들이 어려워하는 티벳고원에도 오르고, 애굽의 시내산, 인도의 혼돈을 보며, 인도와 네팔의 히말라야 그리고 에베레스트와도 해후했다.

이와 같이 때로는 외롭고 쓸쓸함을 찾아 소년은 60, 아니 70을 넘어서도 이 세상을 방황하고 싶을 때가 있다. 혼자서 걷고 생각하는 것만이 그에게는 항상 풍요를 가져다 주었다. 그는 한 송이 꽃과 풀잎에서도 저 ‘사쿤다라’ 에서의 예시처럼 어떤 징후를 느낄 때가 있다.
 
그래서 그의 여행은 계속 되고 어줍잖은 곳에서도 감탄하고 반길 것이 있는 한, 그의 여행과 삶의 탐구는 보람 있다 할 것이다.

 (‘사쿤다라’ 이 작품은 AD 4세기, 인도 카리라사의 희곡작품으로 도유샨다왕을 만나기 전 사쿤다라는 호수가의 풀잎에서 이상한 징후를 느끼자 후일 그의 (도우샨다왕) 기념 지환을 연못 속에 빠뜨리게 됨으로써 비극은 시작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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