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고향 세시기 (歲時記)

예전 강원도 (지금은 경상북도) 두메산골에서는 정월 초하룻날과 정원 보름, 그리고 4월 초파일과 6월 유두, 8월 한가위 등, 그리고 양력 10월경에는 또 마을 학교에서나 아니면 읍내학교 중, 그 집 아이가 다니는 학교운동회가 일년 중 가장 즐거운 날이었다.

정초(正初) 설날은 이날을 위하여 그 전날 그믐께부터 부엌에서는 구수한 음식냄새와 떡메치는 소리, 그리고 외양간에서는 소들에게 이날만은 푸짐하게 만두국을 끓여 대접하는 풍습이 있었고, 보름날에도 소들에게 나물과 찰밥을 지어 키에다 담아 그 해의 운세를 점치던 풍속이 있었다.

그래서 섣달 그믐날은 소의 날이라고 하였고, 키에 나물과 밥을 담아 소가 나물을 먼저 먹으면 그 해에 흉년이 들고, 밥을 먼저 먹으면 풍년이 든다고도 믿었다.
어쨌거나 모두 농경사회에 있어서 한 해 동안 소의 노고를 치하하고, 또 소에게 모든 것을 걸었던 우리 인간들의 소망이 여기에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 예전 그러한 소원과 소망이 있는 그 사회는 행복했고, 또 아름다울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날은 어른이고 아이고, 온 집안이 모두 평화롭고 행복하였다.

그리고 모든 것이 풍족하게만 느껴지는 것이었다.

한 6,70년전, 강원도 두메산골 내 고향 울진에는 으레 설무렵이면 보통 눈이 한길씩이나 내렸고, 사람들은 설피를 신고 다녔다. 이때 집안에서는 외부와의 두절로 가족 친지간의 대화며 그 우애가 더욱 돈독해 지는 것이었다.

눈에 묻힌 굴뚝에서는 흰 연기가 바람에 나부끼는 정경하며, 구들안 아랫녘엔 명절에 쓸 술독에서 괴어나는 거품소리하며, 사랑방 천장에는 으레 메주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아이들은 따끈한 구들장에 배를 붙이고, 먹을 것이라고는 메주에서 때낸 콩콤한 반쪽짜리 콩을 빼내먹는 그 재미가 좋았다. 그래도 우리는 행복했고, 그 인정은 천금만금을 주어도 살 수 없는 인정들이었다.

설날은 집안 어른들과 함께 일찍 조상님께 차례를 모신 뒤 돌아가며 세배를 드리고 세뱃돈을 타던 일, 정초 3일간은 보통 나이 많은 고로(古老) 들을 찾아가 세배하고, 무명옷 그 옷고름에 세뱃돈 받은 동전 몇잎을 넣고는, 윷놀이, 자치기, 널뛰기, 팽이돌리기와 땅뺏기등, 보름까지 계속되었다.

보름날에는 도시의 쥐불놀이 대신 관솔불을 밝혀 뒷산에 올라 달맞이 하던 일, 아이 없는 집에서는 아낙네들이 더 높은 산에 올라 자식 낳길 소원했고, 아이들은 이골목 저골목을 신나게 누볐었다.
 
4월 초파일 무렵이면 화전놀이 갔던 누나와 새댁네들, 산에서 부친 지지미와 그 위에 참꽃(진달래)으로 수놓은 떡이 그렇게도 고왔다. 그리고 할머니들은 2십리 혹은 3십리 밖에 있는 절을 찾아 시주하고 소원을 비노라 가고 오던 정성, 그 소원들을 비는 정성은 끝이 없었다.

그때마다 귀한 쌀과 떡으로 시주를 대신했고, 돌아오실 적엔 하다못해 그 손주에게는 마른 고깜하나라도 쥐어주는 것이었다.

그 보다 한해 몇 번 없는 나들이에 풀냄새 신선한 고운 옷 챙기시고 파랑 혹은 감자주 깃동전을 하고 가시던 우리 할머니 그리고 우리 어머니, 보기만 하여도 즐거웠다.

5월 단오날에는 옛 풍속에 추천(그네)놀이가 성했다고는 하나 우리 고장에서는 씨름대회가 성황을 이루었다.

 6월 유두, 아니 초복에는 물 논에 꽂아 둔 시루떡을 파내어 시냇물에 헹구어 그냥 먹던 옛일이 어제만 같다.
6월 유두 풍속에는 그해의 풍농을 기원하는 뜻으로 한창 자라는 벼사이 물논에 찰시루떡을 종이에 싸서 나무꼬챙이에 깃발을 달아 떡위에 꽂아 함께 묻어두는 풍속에 따른 것이었다.

그리고 7월 백중에는 여름내 안거(安居)를 마치고 대중 앞에서 자기의 치부를 말하여 참회를 구하고, 절에서는 또 제를 올리기도 하였다. 8월 보름도 우리에게 일년 중 제일가던 명절로서 더더구나 아이들에게는 이날만은 어른들이 미리 마련해두신 새 양말 한 켤레를 받아서 신으면, 또 새 양말을 얻어신기 까지는 1년이 가곤하였다.

겨울에 바닥나면 겹겹으로 기워 신다보면 온통 바닥은 무명 헝겊으로 채워진다. 이토록 귀한 시절의 양말이니 얼마나 좋고 소중했을까.

나는 말이 2대독자이지 작은 할아버지께선 무후시라 3대 독자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우리 작은 할아버지께서는 후사가 없으셔서 아들을 보기위해 할머니가 무려 네분이셨고, 그래도 후사가 없었기에 아들 넷을 양자로 들였기에 내 어렸을 적엔 이 5촌들과 그 밑에서 난 6촌들하며 이래저래 차례 때 제꾼으로는 20여명이 넘었었다.

이곳에서는 먼저 종가집인 우리집 차례를 지내면 차례로 작은 집들 차례순이 된다.

그때 우리집 차례상은 높고도 컸으며, 그 아래 향로상과 제주상이 따로 있었다. 우리집에서는 할아버지를 비롯해 장짜성을 가진 어른들께서는 모두 술을 못하셨기에 제주상에는 으례 감주상을 대신했다. 어린 나는 항상 종손으로서, 가장 어른이신 우리 할아버지 옆에서 차례를 올렸고, 배례 후, 장고시에는 엎드려서 한참을 기다리는 그 시간이 그렇게도 지루하였다. 나는 그때마다 앞에 차려진 제주상의 주전자를 앞으로 끌어당겨 주전자의 꼭지를 입에물고 그 단물을 홀짝 홀짝 빨곤하였다.

그러나 할아버지께서는 모른척 하시다가도 내가 지나치다싶으면 큰 꾸중도 하시곤 하였다.

지금 나에게도 손자 둘이 있어 그들도 제사 때 마다 내 옆에 꿇어 엎드려 제사와 차례를 지낼 때면, 나는 그때를 회상하며 혼자 미소짓곤 한다. 세상은 덧없어 그 할아버지, 아버지, 그리고 오촌, 제당숙들도 이미 떠나신지 오래건만, 그때 그 정황들만은 또렷이 내 각막속에 살아있다.

차례가 끝나면, 어른들은 검은 갓에 흰 두루마기 깃을 날리며 개울따라 산에 오르고, 산에는 등성이마다 온통 성묘객으로 어른 아이할것없이 먹을 것도 많아 그저 즐겁기만 하였다. 이날만은 집안 간에 우애를 다시 한번 다지며 오래쌓인 해묵은 이야기와 가족과 친지간에도 나눌 틈이 없던 집안 이야기며 조상님들에 관한 옛 이야기도 비로소 이때 들을 수 있고, 묘사에 관한 얘기도 오고간다.
가장 집안이 단합하고 문중이 일체감을 갖게 되는 것도 이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어쨌든 이날은 성묘객들로 산과 들에는 흰옷 물결이 파도치던 그때의 정경이 꿈만 같이 다가온다.

그날부터 3, 4일간은 동네안 큰 나무가지에 굵은 밧줄 그네를 메고, 다 큰 처녀와 아낙네들이 나와 높이 높이 그네춤을 추던 일이 어제만 같다.

내가 커서 마음했던 순이도 그 그네를 뛰며 놀았다.

아가씨들은 긴 댕기머리 흰 버선에 짚신을 신고, 있는 집 새 아낙들은 검정 고무신에 흰 버선발이 곱고, 여민 치마폭이 하늘을 날을 때 버선 위 흰 종아리 살이 살짝 보일 때면 어린 눈에도 그것은 매혹적이기만 하였다.

시월 상달에는 가을 저녘 하늘 높이 기러기 여덟팔자 줄을 지어 북녘하늘을 찾아 높이 높이  날아가면 나는 왠지 서러워만 졌다.

샛강 백사장엔 푸른 달빛아래 원을 두른 강강술래 하늘위에 메아리치고, 동지엔 팥죽 쑤어 귀신에게 사하고, 섣달에는 지신 밟아 액운을 풀었었다.

이런 것이 내 어렸을 적 내 고향 인심과 풍경이었고, 그곳은 그렇게도 정다웠던 곳이기도 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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