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지사장 임명룡 칼럼

조선시대 때 둔전(屯田)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둔전에 소속된 농민은 평시에 농사를 짓고, 비상시에 병사가 되기 위해 개인 병장기를 갖추고 기본적인 군사훈련을 받았다. 임진왜란 이후 개인이 경작지를 확보하여 사둔전을 운영하는 사례가 증가하는데, 울진군 후포면 마룡산(406m) 일대에도 사둔전이 존재했다. 그 시작은 이러했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27년(1594년) 11월 17일,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울산 서생포 해변의 적로(賊路)에서부터 영해와 강원도 평해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평탄한 지대여서 관방을 설치하기가 어렵습니다. 듣기로, 영해 북쪽 끝 평해와 경계 지역에 우여(雨餘)라는 산이 있는데, 산세가 험준하여 삼면이 절벽이고 오직 일면만이 통행할 수 있으며, 산속에는 시내가 있어 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 합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만일 우여산에 산성을 설치하고 둔전병(兵)을 두어 농사를 지으면서 지키게 한다면 관동(關東)의 왜적을 차단할 수 있다.’ 합니다.”하니 상이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만일 그렇다면 이 일은 지체해서는 안 되니 속히 처리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그곳은 영덕군 칠보산과 울진군 마룡산이 해발 200미터 부근에서 만나며 자연분지가 형성된 곳으로, 금곡천과 여심천 그리고 삼율천의 수원지에 해당한다. 실록의 기록과 같이 울산에서 영해 북쪽에 이르기까지는 요새(要塞)가 될 만한 곳이 없는데, 금곡천과 여심천 사이는 험준한 산악이 바다와 붙어있어 요새로 부족함이 없다. 특히 금음3리(여싐) 뒷산은 바다에서부터 이어진 암벽이 가파르고 험준하여 적로를 차단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인근주민들은 둔전이 있던 지역을 둔재미 또는 지애미, 줄개[줄ː개] 등으로 부르는데, 깊은 산속에 대규모 농지가 형성되어 있으며, 둔전과 관련한 여러 흔적들이 남아있다.

아쉽게도 실록에는 더 이상 그곳에 대한 언급이 없다. 평해 지역에 둔전이나 궁방전이 있었다는 역사적 자료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구전과 지명에 남아있는 어원적 근거 그리고 다양한 흔적들로 그곳에 둔전이 존재했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효령대군 후손 이익무(李益茂)의 입향(入鄕)을 통해서 근거를 살펴볼 수 있다. 『조선환여승람』 울진군편 선행(善行) 부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이익무는 전주이씨로, 자는 의언 호는 만산(晩山)이며 효령대군 후손이다. 성품과 행동이 두텁고 문사가 매우 넉넉하였으나, 은둔에 뜻을 두어 선조 대(代)에 평해 남면 만산동으로 은일하여, 샘을 관리하고 앞에는 돌로 보루를 쌓았으니 훗날 통정대부로 추증되었다.”

보다시피 장계가 오르고 곧이어 종실 사람인 이익무가 그곳에 입향 한 것이다. 그가 정착한 만산동이 바로 ‘둔재미’다. 지금의 ‘만산마을’은 마룡산 비탈에 경사를 따라 형성된 작은 산골이다. 비변사 지도에도 비슷한 위치에 평해 남면 만산(萬山)이 나타난다. 하지만 지도에 표기된 만산은 이익무가 정착한 둔재미를 의미하며, 지금 만산마을은 그 터의 일부 혹은 그 둔전에 소속된 자연부락이다. 만산 외에도 덕인2리(설바우), 덕인3리(조씨리, 옹조골), 병곡면 삼읍리(홈내미, 종지비) 등 마룡산을 둘러싼 자연부락은 모두 둔전에 소속되었던 마을이다.

이익무는 그 지역에 사둔전을 설치하고 적로까지 연결되는 길을 닦았다. 내가 어렸을 때도 둔재미에서 금음3리 뒷산까지 산등성이에 폭 2미터가 넘는 길이 나있었는데 그 길의 용도가 항상 궁금했다. 나중에 둔전과 관련된 자료를 보고 그 길이 적로를 차단하기 위한 용병들의 이동로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우여실등날’에서부터 마룡산 너머까지 ‘소리’가 전달되는 경로도 있었다. 마룡산 장기바위는 원래 ‘소리바위’였고 ‘설바우’라는 마을이름은 ‘소리바우’의 축약이다. 또 ‘조씨리’는 창녕조씨 선비가 정착할 곳을 찾던 중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한 소년이 있기에 그와 의논하여 이곳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소리바위 바로 뒤에 있다. ‘종지비’는 원래 종지변(宗地邊)으로 종실의 옆이라는 뜻이다. ‘종지앞’이라는 지명과 상응한다. 사실 이곳 뿐 아니라 울진의 자연부락 대부분은 역사가 스며있다. 그 흔적들을 발굴하여 제대로 기록하는 것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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