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규의 월송정에올라...20회

이종규 평해연세의원 원장
이종규 평해연세의원 원장

 

반세기 전에 헤어진 사람에게서 연락이 왔다. 미국이라고 한다. 목소리와 억양이 귀에 익숙하다. 유별나게 눈망울이 크고 목소리가 맑고 긴 머리를 흩날리던 학생이었지만, 이미 50년이 지난 후라서 전혀 상상이 되지 않는다. 그런 궁금증을 해결해 주고 흐뭇한 느낌을 전해주는 문명의 이기가 또 이토록 고마울 수가 없다. 무려 반세기 동안 잊었던 사실들을 손안에서 해결해 주었다.

의과대학에 다니면서 아르바이트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용돈을 마련한 적이 있다. 그 후 틀에 박힌 삶의 현장을 벗어나지 못하고 지금까지 보낸 시간이 반세기가 넘는다. 물론 그 학생들이 어쩌다 생각이 나기도 했지만, 염두에 두거나 관심의 대상이 되지는 못했다. 이미 미국에서 삶의 기틀을 잡고 있다가 우연히 TV를 시청하고 수소문해서 알게 되었다며 마냥 어린애 같은 음성이다. 이제는 60이 넘었을 텐데 반가운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다. 근대화의 어렵던 시기를 함께 보냈던 사람들이라서 더 유별나게 기억에 남는다.

날씨가 추워지면 움직임이 둔해지게 마련이다. 당뇨병의 치료는 식이요법과 운동요법이 우선이다. 그래서 많이 움직이라고 주문한다. 혈당을 측정하고 당화혈색소를 주기적으로 측정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후유증을 예방하고 투약하는 데 중요한 지침이 된다.

혈당을 측정하는 일은 참 귀찮다. 매번 날카로운 주사침으로 손가락을 찔러서 혈액을 채취할 때마다 찡그리고 찌푸린 표정이 진료실의 분위기를 어둡고 무겁게 만들기도 한다. 현대의학은 이미 경험 학의 범주를 벗어나고 있다. 컴퓨터의 이용은 의학의 치료 범위는 물론, 그동안 베일에 싸인 유전자의 세계까지 낱낱이 파헤치고 있다. 머지않아 신경계까지 정복할 게 자명하다.

DNA의 구조와 더불어 핵의학 분야도 광범위하게 발전하고 있다. 원시의 약초 세계에서 벗어난 지 이미 오래다. 인체 내에 작은 칩을 심어 놓으면, 모든 생체 정보가 핸드폰으로 기록되고 있다. 혈압, 혈당, 심전도 등을 포함해서 의사들이 진료하면서 필요로 하는 모든 생체 정보를 한눈에 알 수 있도록 제공해 준다. 현대는 가히 컴퓨터 의학 정보 시대나 다름없다. 지금 우리는 이런 시대에 살고 있다.

의사들이 환자를 진료하면서 가장 아쉽게 생각하는 문제를 지적하라고 하면, 나는 서슴지 않고 인간적인 접근이 소외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따듯한 감정이나 서글픈 감정은 오로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만 오고 갈 수가 있다. 물론 언젠가는 이것도 컴퓨터를 이용해서 가능해 질 수 있겠지만, 너무 기계적이고 감정이 없고 차갑게 느껴지기만 한다.

인간의 기계화나 기계의 인간화가 경쟁적으로 발전하는 요즈음이다. 그런 중에 반세기 전의 기억을 잊지 않고 연락하는 인성이 너무도 곱다. 맛깔스런 세상이다. 인정이 넘치고 구수한 정감이 풍긴다. 차갑고 사무적이고 냉소적인 기계 만능주의보다는 훨씬 다정다감하고 가치 있게 느껴진다.

이런 인간적인 삶을 전달해 주는 건 역시 기계에 지나지 않는다. 기계는 인간의 가치를 보존시키고 지속 시켜주는 수단과 도구에 불과할 뿐이다. AI(인공지능)와 바둑 경기를 해서 이길 수가 없다고 한다. 인간의 한계일까?

차갑고 냉정한 기계에서 따듯한 감정을 느낄 수가 있을까? 오늘을 살아가면서 많은 오류가 생기고 비록 승률이 떨어지더라도 따듯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곳에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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