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병식 편집국장
오늘 아침 보슬보슬 봄비가 내린다. 나는 비오는 날에 대한 집착증을 가지고 있나보다. 이런 날이면 심경도 차분해지면서 어딘가로 훌쩍 떠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곤 한다.

아무도 찾지 않는 아궁이불 땐 초막에 숨어 들어 머릿속을 완전히 비우고 죽은 듯 심신을 눕히고 싶다. 

어젯밤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내가 잘하는 것은 밥 잘먹고 잠 잘자는 것인데 어젯밤은 그렇지 못했다. 이번 신문은 오늘 나의 칼럼만 들어가면 편집이 완료된다.

최근 지역관심사는 선거이다.  가장 큰 지역관심사를 회피하고 주변을 배회한다면, 이는 지역언론으로서의 사명을 저버리는 것일텐데...독자들에게는 매우 죄송스런 얘기지만, 나는 그동안 성의없이 글을 썼다. 단시간에 대강 써버리니 고민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나는 잠을 못 이룰 만큼 깊은 고뇌에 빠졌다. 그동안 수 많은 칼럼을 써 지역여론을 형성해 왔지만, 이번처럼 무엇을 어떻게 쓸까를 두고 고민한 적이 없었다.

내 판단으로 울진신문은 발행 17년 동안 최근 두번째로 가장 활발히 지역여론의 중심에 서 있었다. 한번은 91년 창간 초기 울진원자력과 관련 주민생존권 확보를 위한 군민들의 각성을 일깨울 때였다. 곧이어 반핵데모가 일어났고, 그 여파는 김중권 전 실장의 첫 낙선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또 한번이 이번이다. 지역대변자가 포항에서 올라온다는 데는 참을 수가 없었다. 강석호 후보가 한나라당의 공천을 받은 이튿날 사무실을 방문했을 때, 도와 줄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했고 이를 실천했다.  

결국 나는 선거기간 중 중앙선관위의 불공정기사 심의위원회에 회부됐다. 진실로 지역의 이익과 민심을 대변한다는 ‘울진신문’의 발행목적에 충실하다 보면 병가지상사라고, 이런 경우도 당할 각오가 돼 있어야 언론인으로서의 자격이 있다는 생각이다    

그렇다고 지금 정치적으로 누가 무엇을 잘못했고, 잘했는지에 대해 책임을 묻거나, 앞으로 군민들이 어떻게 판단하고 행동해야 하는 가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잠 못 이룬 것은 이번 선거기간 중 내가 소중하게 여겨온 사람을 잃어버린 데 있다. 다른 사람을 비판하기 전에 정말 비판 받아야 할 사람은 바로 나란 것을 안다.

나야말로 나쁜 놈이다. 음풍농월이나 하며 게으르고, 주색잡기나 즐기며 잔머리나 굴리고, 남 비판이나  잘하는 정말 돼먹지 못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가 잘하던 못하던, 지위가 높든 낮든 김광원의원은 내가 소주 한잔 나누고 싶은 몇 사람 중에서도 1순위로 꼽고 싶은 분이다. 십수년전 그와의 첫 만남을 잊을 수 없다.  

호젓한 저녁시간 바닷가에서 처음으로 국회의원이란 귀하신 분과 단 둘이 술잔을 마주하니 나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는 얼마전 아프리카를 다녀왔다며 이야기 보따리를 풀었다.    

그는 한참 여행담을 하던 중 검둥이 아가씨와 오입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어느 나라 여자나 그것만은 다를 게 없더라’는 소감까지 곁들였다. 나는 박장대소 했다. 물론 사실이 아니겠지만, 처음 자리한 새파란 후배의 얼어버린 몸과 마음을 완전히 녹이는 방법을 아는 분이었다.      

그 뒤로 나는 그분을 보기만 해도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번졌고, 동네 형님처럼 까닭없이 좋아하게 되었다. 실제로 오랫동안 멀리서나마 보아온 나는 그분의 소탈한 인간미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나는 이번 선거기간 중 대의(大義)를 빌미로 감히 그 분의 역린을 건드렸다. 12년만에 처음이라고 하지만, 이제 그분을 뵐 면목이 없다. 

아직 보슬비는 내린다. 세상이 잔잔한 이런 날은 쐬주 한잔 생각이 난다. 언제든지 찾아가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누며, 술잔을 기울이고 싶은 그런 분이 가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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