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지킴이 칠순 쯤이야! 연탄배달원 남진양 옹

   
                                   남진양 옹
“젊은 청년들도 6백장의 22공탄을 2층까지 2~3시간만에 배달하려면 상당한 체력의 소유자라야 합니다. 연탄 한 개의 무개가 3.5kg이니, 12개를 지고 2개를 집게로 집어 나르면 한번에 약 50kg 정도의 무게입니다. 6백장을 나르려면 2층까지 약 43번을 오르락 거려야 합니다.”

이 일을 73세의 노인이 하고 있다면, 누가 잘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다. 3년전부터 울진읍에서 소일 삼아 해왔다는 남진양 어른. 울진읍내에 나가면 지금도 어렵지 않게 연탄을 져 나르고 있는 그를 만날 수 있다.

참으로 젊은 오빠다. 이 어른의 어디에서 이처럼 강인한 체력이 나올까! 키도 별로 크지 않고 약간 마른 편인데, 이 어른의 뒷 모습을 보노라면 남들과는 틀리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언뜻 보아 운동으로 다져진 20대의 몸매다. 목덜미에서 허리로 이어지는 등뼈선이 남달리 반듯하다.

어떻게 체력을 유지하느냐의 질문에 그는 젊은 시절부터 줄넘기를 해왔다. 거의 매일 아침 30분 이상 계속해 온 것이 건강의 비결이며, 일체 육식을 하지 않고 채식주의로 평생을 살아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늘상 웃으면서 생활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나를 노령에 쉬지 않고 연탄이나 배달한다고 비웃을 지 모르나, 나는 할 일이 있어 즐겁고, 수입이 생겨 즐겁다”며, 특유의 너털 웃음을 짓는다. 특히 요즈음에는 기름값이 올라가 연탄을 찾는 가정이나 사무실이 늘어나고 있어 어려운 사회 실상을 느끼는 만큼, 자신의 수입은 솔솔 올라가고 있으니 이 또한 즐겁지 않을 수 없다고.

그는 울진읍 정림리의 부유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7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중학을 거쳐 당시 울진고(2회)를 졸업했다. 장가는 일찍갔다. 고교 2학년때 삼척의 홍씨 집안과 혼인했다. 당시 조혼 풍습과 일종의 집안 과시였다.
그는 어릴때부터 자립심이 강했다. 등교할 때 조금씩 그리고 휴일에 나뭇짐을 져 팔아 학비는 자신이 조달했다. 고교를 마치고 군대를 다녀와서는 부인과 함께 동해안 5일장을 찾아 다니며, 약 7년간 피복장사를 했다.
당시 고교를 졸업했으면 공직에 들 수도 있었고, 추천도 있었지만, 성격상 얽매이는 것은 싫어해 이후 쭉 자영업을 했다. 무엇이든 스스로 헤쳐 나가려는 의욕이 남달리 강했다.

1967년(?)인가 울진에서 가장 큰 교통사고가 일어났다. 울진에서 호산장을 보러 가던 장사꾼을 태웠던 버스가 도 경계에서 굴러 24명이 사망하는 대형 참사가 일어났다. 이때 약 50명 승객 중 한 명이었던 남 노인은 털끝 하나 다친데 없이 멀쩡했다. 여하간 이후로 떠돌이 옷장사를 그만뒀다.

이후 새마실에다 사탕과 빵공장을 차려 한 5년 운영했을 때, 뜻하지 않은 생의 고비를 맞는다. 돈과 재료를 훔쳐 달아난 배달원을 잡았다가 오히려 6개월간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
그동안 안동교도소에서 끌과 대패 등의 사용법 등 신 목공기술을 배워 출소를 했다. 그런데 이 무렵 박대통령이 추진한 새마을 사업의 일환인 초가지붕 개량 사업이 막 시작되었다. 농촌에는 스레트 지붕을 덮는 그의 신 기술을 고대하고 있었다.
3년간 많은 돈을 벌었다. 자재비와 인건비를 선금을 주면서 줄을 서 차례를 기다렸다. 그동안 진 빚을 다 갚고도 딸 아이 둘을 하나는 음대를, 하나는 미대를 졸업시킬 수 있었다.

그 참 인생 반전이었다. 교도소에 갈 때는 억울하고 분하고, 인생 끝난 것 같더니만, 교도소를 통해서 그야말로 인생의 새 출발이 기회를 얻었던 것이다.
그 후 국내 경제 생활 수준이 계속 향상되면서 또 나무와 연탄의 주 연료시대가 가고 기름보일러 시대가 도래했다. 보일러대리점에서 한 5년간 일하며 기술을 배웠다. 그리고 5~6년 정도는 보일러 설치 자영업을  했다.

48세쯤 되던 1985년경 북면 고목리의 남재호 대목수 밑에서 한옥건축 기술자로 약 15년간 일했다. 사람들은 돈을 벌자 기와집을 짓기 시작했다. 신속하고 편리한 양옥 대신 전통과 품위를 찾았다.
이제는 그동안 번 돈으로 여생을 마무리 해야 될 듯 했다. 그러나 그는 달랐다. “전혀 부끄럽지 않습니다. 미국에서는 직업이 없는 사람이 제일 부끄러워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나는 건강이 따라주는 한 일을 할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진짜 건강의 비결일지도 모릅니다.

일을 하면 항상 즐겁습니다. 돈도 생기고, 어떨 때 나보다 어려운 이웃을 만났을 때 도움을 주기도 하고요. 농사꾼이었지만, 학문이 높으셨던 아버님의 말씀 아직도 귀에 쟁쟁합니다.
“ 잘못된 행동으로 양반의 뼈골을 손상시키지 마라.” 지금 나의 생활 신조입니다. 남한테 피해 안주고 사회나 국가에 누를 끼치지 않는 것입니다. ” 
임헌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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