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가에서 ■ 남 문 열 집필위원

        
▲ 남문열 집필위원
나는 1959년 당시 22세였던 따뜻한 어느 봄날 군무에 종사할 때 술 마시는 것을 배워서 지금껏 계속 음주하고 있다.

지금부터 50년전 강원도 화천군 소재 2사단 의무대 근무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어느 일요일 아침, 전라도 출신 조상병이 자기의 私物을 세탁하기를 나에게 명령했지만 하지 않고 무사히 넘어갔다.

그 다음 일요일 두 번째 세탁명령을 받았다. 일찍 저녁을 마치고 내무반에 들어온 조상병은 “남병사”하고 나를 불렀다.
내 앞으로 다가서더니 “오늘은 내 세탁하였지?” “못하였습니다.” “요것 봐라, 부엌 아궁이에 머리를 박고 엎드렸!” 조상병은 몽둥이로 때릴테니 맞을 때마다 하나, 둘, 셋... 을 헤아리라 하였다.
나는 매를 맞으며 “하나, 둘...”을 헤아리다가 세 번째는 벌떡 일어났다. “군대의 민주화, 민주군대라는 요즈음 세탁은 무슨 세탁이냐?”고 중얼거리며 다리야 날 살려라 하고 36계 줄행랑을 놓았다.

산 정상까지 도망친 나를 위로하기 위하여 진주출신 박상병이하 수명의 전우들이 산 중턱에서 불렀다.
 “남병사! 남병사! 마음을 고쳐먹고 내려오너라! ” 큰소리로 수없이 불렀다. “탈영하면 못쓴다. 우리가 모두 책임진다.” 몇 시간이나 지났는지 나는 못 이기는 척하고 박상병등 전우의 뒤를 따라 하산했다. 

그 후 무표정, 무언으로 일관하며 항쟁하던 3주일이 지난 어느 일요일 아침, 최상 고참인 박병장이 나를 불러서 따뜻하게 말하였다. “민간 부락에 외출가자!” 라고 하길래 내심으로는 호기를 잡았다고 생각하고 마지못한 듯이 승낙하여 박병장, 조상병을 따라 외출했다.
어느 민간주점에서 두 고참들은 私酒막걸리를 번갈아 가면서 나에게 권하는 막걸리를  한없이 받아 마셨다.
내무반에 돌아와서는 먹은 막걸리와 나물등을 모두 다 구토해 버렸다. 창자까지 끊어져 넘어 오는 듯하였다.

이것이 내 음주의 첫 효시(嚆矢)이다.
그 후 술 때문에 많은 해프닝이 벌어졌다.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靑苔(청태) 이야기이다. 고인 A씨를 남들이 A청태라 불렸다. 본인은 이를 무척 싫어하였다.
그러나 그 누구도 나를 청태라 부르지는 않았다. 친화력이 부족한 나지만 0형의 처지를 동정이라도 하듯 자칭 “성은 남이요, 이름은 청태”하고 命名하였다.

여기서 잠깐 청태에 얽힌 일화(逸話) 한 토막을 소개하겠다.
재무과장 시절 어느날, 김군수께서 실과장 간부회의시 후포상수도 집수정에 청태가 끼어 위생적으로 매우 불결하다고 그 당시 도시과장 권00를 여러번 질타하였다.
나는 김군수를 모시고 간부들이 회식하는 자리에서 소위 청태철학을 늘어 놓았다. ① 청태는 녹조류의 파래과에 속하는 풀의 하나이다. ② 고기의 은신처가 되고 먹이도 된다. ③ 햇빛이 비치는 한계 거리까지만 청태가 끼고 세균이 많은 흙탕물에는 성장하지 않는다. ④ 파도나 홍수에 이겨서 씻겨 내려가지 않아야 참다운 청태라 할 수 있다. 위와 같이 녹색환경, 고기의 은신처와 먹이, 밝고 맑은 희망, 외압에 굴종하지 않는다는 등 생물학적, 철학적인 청태 예찬론(禮讚論)을 설파(說破)하였다.

그 후 상수도 청태에 대한 질타는 온데 간데 없고, 간부회의시 중대하고 예민한 사안을 긴장된 태도와 강경한 어조로 지시하시고는 회의가 종료될 무렵에 “오늘 간부회의는 “남청태씨”가 주재했으면 나보다 훨씬 잘 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니 모든 간부들이 가볍고 평온한 마음으로 하!하!하! 하고 한바탕 웃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음주함은 過失만 있는 것이 아니고 얻는 것도 있다. 음주의 이해득실을 한번 생각해 봄직도 하다.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술을 배우기 전에는 법규적, 고정적, 소극적, 평면적, 보수적인 생각들을 주로 하게 된다.
그러나 술을 적당히 마시면 합목적적, 적극적, 입체적, 개혁적이고 때로는 현실을 초탈한 아이디어가 떠오를 수가 있었다.
그래서 작가, 소설가, 화가 등 예술가 특히 李太白이나 黃眞伊 같은 詩聖이 술을 즐겼을는지도 모른다.

주석에서는 상대방과 원활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기 쉽고 상호이해와 협조의 폭이 넓어지는 듯한 느낌도 든다. 다방에서 차 한 잔 마시고는 진솔한 이야기나 통정을 하기가 어려울 때도 있다. 술 한 잔 오고가는데 인정이 왕래하는 생각도 할 때가 있다.
술자리 시초에는 어색하여 서먹서먹하다가 술이 얼큰해지면 김형, 이형하곤 정다워진다. 이래서 정이 많은 우리들에게 술 잔 돌리는 음주문화가 생긴 것일까?

“過猶不及”(논어 제11선진편제15장) 이것은 生活哲學에 있어서 특히 酒道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덕목중의 하나이다. 과유불급의 뜻은 지나친 것은 모자라는 것과 같다.
다시 말하면 지나침을 억제하고 미치지 못함을 이끌어서 中道에 돌아가게 한다는 것이다.
子曰(전략) “七十而 從心所欲하되 不踰矩(불유구)니라”(논어위정편 제4장) 공자께서는 70세에 마음이 하고자 하는바 즉 욕망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서 행동하더라도 법도를 어기지 않은 경지가 되었다고 말씀하셨다.

이렇다 할 遺業없이 부질없는 내 나이 어언간 72세, 萬感이 交叉하는 음주50년의 명경(明鏡)앞에 비록 凡夫일지라도 過猶不及을 生活의 座右銘으로 삼아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깊고 고요한 어버이날 밤에 가슴에 양손을 얹고 사색과 고민을 반추하며 독백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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