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칼럼 임명룡 논설위원

  ▲ 임명룡 논설위원

70년대에 중학교 시절을 보냈던 사람들은 국어 교과서에 실린 단편소설 《요람기》를 기억할 것이다.

『기차도 전기도 없었다. 라디오도 영화도 몰랐다. 그래도 소년은 마을 아이들과 함께 마냥 즐겁기만 했다.
봄이면 뻐꾸기 울음과 함께 진달래가 지천으로 피고, 가을이면 단풍과 감이 풍성하게 익는, 물 맑고 바람 시원한 산간 마을이었다.』로 시작하는 오영수의 작품이다.

국어시간에 이 소설을 배우던 70년대 중반까지 필자가 살던 산골에도 전기가 없었다.
78년 겨울에서야 비로소 전기가 들어온 오지 마을에서 자랐던 탓에 소설 배경과 비슷한데서 오는 공감대가 각별했던지, 쉰이 다된 지금도 가끔 《요람기》를 읽고 회상에 젖는다.

그 시절 어쩌다가 어른들을 따라 평해 읍내 장날 구경을 가면 어마어마한(?) 규모에 겁부터 먹었던 기억이 난다.
소설에서 소년은 소 한 마리 먹이기가 늘 소원인데, 평해 장날에는 그 시절에도 우시장(牛市場)이 있었다.

사진은 일제시대 때 사용되었던 우편봉투이다. 발신지는 경성부(京城府) 종로2정목(鐘路2丁目) 64번지 영창서관(永昌書館)으로 찍혀있다.
서울 종로 2가 주변에는 지금도 대형서점들이 많이 자리하고 있는데, 저 주소로 보아 일제강점기 때 이미 큰 서점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어쩌면 지금 있는 영풍문고의 전신(前身)일지도 모른다.

          ▲ 일제시대 사용된 우편봉투

아무튼 서울의 영창서관에서 평해면으로 보낸 봉투이고, 수신자는 평해면 평해리 김대성씨로 조부의 친구분이셨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간단한 주소이지만 평해에 살았던 분의 유품 중에서 나온 것이니 어쨌든 제대로 전달되었던 것 같다.
그런데 저 간단한 주소마저 울진군(蔚珍郡)이 아니라 울산군(蔚山郡)으로 오기 되어 있다는게 흥미롭다.

인구가 오늘날과 같이 많은 시대가 아니라 하더라도 서울에서 울산군으로 보낸 편지가 울진군 평해에 도착하기는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평해라는 이름이 그만큼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평해는 원래 큰 고을이었다.
1914년 3월 1일부로 울진군과 병합하면서 울진군에 속하기 전까지 강원도 평해군이었다.

당시 평해군의 범위는 상리면, 북하리면, 남하리면, 남면, 근북면, 근서면, 달북면, 달서면 등으로 지금의 기성면, 온정면, 후포면이 평해군 소속이었다.

그때 울산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모르지만 평해도 당당한 군 소재지였던 것이다.
지금 울산은 전국 7대 광역시에 인구 113만명, 1년 총 예산이 1조 6천억원이나 되는 세계적인 도시로 발돋움했다.

반면 평해는 인구 4천명도 안 되는 작은 마을로 남아있다.  평해에 포스텍 해양대학원이 설립될 예정이라고 한다.  또 인근 울진공항은 국토해양부가 나서서 항공전문인력 양성을 위한 비행교육훈련원으로 재탄생하게 될 전망이다.
평해에 본적을 둔 사람으로서 참으로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울진의 평해가 그동안 긴 겨울 속에서 마침내 첨단의 싹을 틔우면서 다시 기지개를 펴는 게 아닌가 여겨진다.

때마침 겨울이 한끝에 이른 동지(冬至)이다. 더 이상 봄이 없을 것 같이 추위가 매섭지만 동지 때부터 식물의 뿌리는 물이 맺히기 시작한다. 궁즉변(窮則變)이요, 변즉통(變則通)이다. 결국은 궁즉통(窮則通)이 되는 것이다.

주역(周易)에서 동지는 지뢰(地雷)복괘(復卦)에 해당하며 복(復)은 회복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옛날에는 동지를 새해로 보기도 했는데 복괘(復卦)의 괘사(卦辭)에는 “七日來復”이란 말도 있어서, 양력 12월 22일 동지(冬至)에 이렛날을 더하면 거의 새해에 해당한다.
2010년 새해에는 울진 평해가 새롭게 부활하는 원년이 될 것을 기대하며, 동지에 즈음하여 기원하는 마음으로 적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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