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문 논설의원
최근 산림청에서 울진의 주요 옛길인 십이령의 일부 구간을 금강소나무 숲길로 명명, 복원하였다. 필자는 이미 십이령 옛길을 역사·문화, 생태적으로 복원하자고 주장한 바 있다.(울진신문 2007. 9. 21) 어쨌든 이 길이 복원되어, 울진의 옛 선인들의 자취를 더듬어보고, 그 주인공들인 보부상에 대하여 새롭게 조명할 수 있어 참으로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금강소나무 숲길’이라는 이름에 대해서는 아쉬운 감이 많다. 무릇 사물에는 이름을 잘 붙여야 한다. 이름은 그 가치성이 충실하게 표현되어야 한다. 그게 진정한 이름값이다. 물론 이름을 지을 때 고심했겠지만, 현재의 이름에는 역사와 문화와 생태가 담긴 조화로움이 결여되었다. ‘금강소나무 숲길’은 알맞은 이름인가?

현재의 이름에는 ‘십이령’이라는 역사성이 빠져버리고 ‘금강소나무’의 생태성만 강조했다. ‘금강송 십이령 옛길’ 또는 ‘십이령 금강소나무 숲길’이라 했으면 더욱 좋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길은 보부상의 역사와 애환이 더욱 짙게 서린 길이요, 이름그대로 순수한 금강소나무만이 있는 숲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 일부 복원된 길은 금강송 소나무보다 활엽수림이 더욱 많이 우거진 길이다. 어떤 이는 ‘십이령 금강소나무숲길’은 이라고 하면 부르기에 길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부르기에 짧고 편리하다고 다 좋은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십이령은 조선조 흥부장(현 울진 북면 부구리)에서 내성장(봉화 소천 등)까지의 열두 고개 길이다. 말하자면 울진의 주요 교통로로서 내륙인 봉화를 지나 한양으로 향하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었다. 십이령은 쇠치재→ 세고개재→ 바릿재→ 샛재→ 느삼밭재→ 저진치재→ 한나무재→ 큰넓재→ 꼬치비재→ 막지재→ 살피재→ 모랫재이다.

꼬치비재부터는 봉화땅이다. 물론 이 열 두 고개는 출발지가 흥부장만이 아니라 울진장과 죽변장에서 시작되기도 한다. 당시 흥부는 동해안 지역에서 상업 활동이 활발했던 유명한 장시였다. 과거 울진의 사람들과 생산물들이 이 길을 통해 내륙으로 오갔다. 이 길의 으뜸 주인공은 보부상들이었다. 보부상들은 울진지역에서 생산되는 미역, 소금, 어물들을 내륙지역에다 판매했다.

미역, 소금, 어물들은 당시 내륙 지역의 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식재료였으며, 특히 소금은 염장식의 음식문화 전통을 세우는데 일조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봉화 사람들은 울진 소금과 돌미역이 없었으면 산모의 미역국도 못 끊이고, 아이들의 돌잔치도 못 치른다고 했다. 안동 간고등어도 울진 소금덕분에 생겨난 특산물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한편 보부상들은 지역의 소식통이요. 문화전파사들이었다. ‘이장 저장 뛰어가서/ 장돌뱅이 동무들 만나 반기며/ 이 소식 저 소식 묻고 듣고/목소리 높이 고래고래 지르며’(‘장돌뱅이 타령’중 일부) 이 구절에서 보듯이 상업 활동 말고도 비상업적인 정보수집, 여론형성, 사교활동 등 다양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사람은 정서가 먼저 통하는 동물이다. 과거의 정서 즉, 옛사람들의 생활상을 실제체험으로 느껴보게 해야 현재적 의미로 가치가 있다.
어느 집단에서나 그 역사적 의미가 빠져버리면 혼이 없는 것과 같다. 십이령의 의미도 마찬가지다. 열악한 근무조건에서도 몇몇 해설사들의 십이령에 대한 역사문화적·생태적 의미를 담은 구수한 해설은 박수를 받을만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미흡하다. 그래서 필자가 제안을 한다.

당시의 주막거리, 쪽지게, 솥단지, 의상, 짚신, 놀이 등을 복원하여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실제 체험케 하는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것과 아울러 보부상 문화와 금강송에 대한 작은 전시관이 있었으면 더욱 좋겠다. 동해안의 차마고도라 할 수 있는 십이령과 금강소나무는 지역 문화상품으로서 그 가치가 충분하다.

앞으로 “사돈요, 장에 왔니껴?” “아이고, 십이령 금강송길 참 좋디더, 한번 가보이소!” 이런 대화를 기대해본다. 그래야 십이령 옛길과 금강소나무 숲길의 현대적 의미를 살린 진정한 복원이 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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