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된 이듬해에 나는 노음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일본인 선생도 일본말 학습도 없었다. 그야말로 순수한 한글세대이다. 해방정국은 어지러웠지만, 우리네 농촌에서는 별로 인상적인 사건이 없었고 학교생활이 조금 복잡했을 뿐이다.

일제 때 학교에 가지 못해 적령기를 놓친 형들이 한꺼번에 입학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형의 형뻘되는 동급생도 많았다. 애지중지 응석받이로 자란 나로서는 형들과 충돌이 빈번했다.

지고서는 못 배기는 외고집쟁이고 보니 싸우면 얻어터지는 일이 다반사였다. 코피가 나는 것은 보통이고 게다짝으로 이마가 깨지기가 일쑤였다. 그래서인지 학교가기가 정말 싫어졌다. 결국 초등교 1년 동안 나는 60일을 결석했다.

2학년에 올라가니 형들은 나이에 걸맞게 월반을 하고 또래의 학우들만 남았다.
싸울 일도 거의 없어졌고 공부도 재미있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1학년 때의 60일 결석에도 전과목 ‘수’라는 통신부(성적표)와 우등상장은 나로 하여금 평생토록 공부에 대한 자신감을 주었던 계기가 되었다. 당연히 2학년 때부터는 1등도 하고 반장도 빼앗기지 않았다.

3학년 때의 일이다.
담임선생님께서 반장인 나에게 매일 학급일지를 기록하게 했다. 학급일지 작성 란에 화단의 변화를 관찰하는 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예를 들면 난초가 하루에 몇 미리나 자라는 지를 자로 재어서 기록하는 일이다.

그냥 보면 난초가 싱싱하게 자라고 있구나 하는 정도지만, 실제로 재면서 보니 그 변화의 양과 속도가 엄청났었다.
이때 배운 관찰력과 기록하는 습성은 나로 하여금 남다른 학습태도를 갖게 해준 것이 분명하다.

또 한가지, 기억나는 일이 있다. 담임선생님께서는 나를 방과 후에 따로 남게 하여 기계체조 훈련을 시켰다. 철봉대에 매달려 억지로 대차연습을 하다가 엄지손가락이 까진 기억은 지금도 또렷하다.

그러나 세상은 공부뿐 아니라, 체력도 뒷받침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남보다 빨리 깨우치게 해주신 선생님이 고맙기만 하다. 나는 일찍부터 공부보다는 운동하고 놀기를 좋아했다.
축구공이 없어서 새끼를 칭칭 동여 감아서 시골집 마당이 좁아 추수한 논바닥에 나가 패를 갈라 놀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동네 뒷산에 올라 나뭇가지로 총을 삼고 솔방울을 주어서 실탄으로 사용하여 병정놀이를 하던 때가 엊그제 일만 같다.

이렇듯 즐거웠던 3학년이 지나고, 4학년이 되던 날이다. 어린 나에게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급우들도 많이 바뀌었지만, 특히 담임선생님이 바뀐 것이 큰 충격이었다. 그것도 남자선생님에서 여자 선생님으로, 그래서 나는 3학년 때 담임하셨던 그 선생님 반으로 가겠다고 우겨댔다.

지금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일을 막무가내로 저질렀다. 아무리 최씨고집(?)이라 하지만, 그것은 도를 넘는 생떼였다. 보다 못한 학교당국은 결국 담임선생님을 바꾸어 주었다. 지금 생각해도 실소가 나온다.

왜 그랬을까? 김선권 선생님의 나에 대한 각별한 애정과 특별지도가 나를 사로잡았을 테지만, 그 심정 뿌리에는 아버님을 여윈 결손가정에서 맛보지 못한 강한 부정(父情) 같은 것을 느낀 게 아닌가 싶다.

6.25가 터졌던 5학년 때의 어느 날이다. 우리 노음초등학교 운동장에 국방경비대가 와서 제식훈련을 보여준 적이 있다. 카키색 같은 제복을 입고 앞으로 옆으로 줄 맞추고 좌로 우로 뒤로 돌면서 왔다, 갔다하는 모습은 우리들 꼬맹이들이 하던 병정놀이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구경하던 나의 모습은 이미 넋이 나가 있었다.

나도 크면 저렇게 되어야지. 부러움의 단계를 넘어서 결심의 경지에 이른 듯하다. 먼 훗날의 이야기가 되겠지만 고등학교 졸업할 무렵, 나는 일반대학보다 사관학교로 진학하고 싶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인 것 같다.

하나는 초등학교 때 국방경비대가 준 강렬한 인상이 지워지지 않아서 이고, 다른 하나는 경제적 사정 때문이었다. 전원 기숙사생활에 국비로 공부시켜 장교로 임관시키니 꿈같은 이야기가 아닌가!

공부보다도 학자금이 늘 문제였던 나로서는 정말 가고 싶은 학교였다. 내가 만일 외아들이 아니었더라면 육군사관학교로 진학했을 터이고 그랬더라면 내 인생 역정도 판이하게 달라졌을 것이다.

지금은 여자도 입학시켜 준다지만 당시만 해도 독자(獨子)는 사관학교 입학이 허용되지 않았으니 못내 아쉬울 뿐이다.

                                                  /청류헌에서 최순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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