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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에서만 정승 8명 배출, 삼사공(三事公)은 울진에서 최초 단독으로 기미만세 불러


▶온정면 소태리에 세워진 애국지사 죽헌(竹軒)과 삼사(三事)형제의 기념비각. 비각옆에 서 계신 분은 이원태 울진군 종친회장.


경주이씨는 약 140만 종족으로 우리나라 본관별 인구순위에서 김해김씨(430만명), 밀양박씨(약 300만명), 전주이씨(약 260만명), 경주김씨(170만명)에 이어 5위를 차지하는 대 족속이다.

이씨 성은 280개의 다른 본관으로 시조를 달리하는데, 우리나라 이씨 전체인구 약 680만명 중 전주이씨가 이씨 전체인구의 약 38%를 차지하고, 이어 경주이씨가 두 번째로서 약 20%를 차지한다.

이원태 울진군종친회장(74세·후포)은 우계 차성 합천 평창 가평 아산 재령 원주 등 많은 분종들이 경주에서 갈라져 나가 본관을 따로 쓰고 있으나, 대부분의 이씨들은 그 원 뿌리를 경주에 두고 있어 경주이씨가 이씨의 큰집으로 정통의 긍지를 가진다는 것이다.

울진에서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은 모두 약 2,800가구에 약 7,700명으로 김씨 성 다음으로 많이 살고 있는데, 그 중 경주이씨는 약 1,173가구에 3,200여명에 달한다.
단일 본으로는 김해김씨가 약 5,800명으로 울진에 가장 많이 살고 있고, 경주이씨가 두 번째 많은 숫자로서, 전주이씨 울진인구 1,700여명의 거의 두배에 가까워 전국적인 상황과는 다르다.

이처럼 전주와 경주인들이 이씨의 거의 대다수를 차지하는데, 울진에 살고 있는 1백명 이상의 인구를 가진 다른 이씨들을 살펴보면, 평창이씨가 465명으로 세 번째이고, 다음으로 안성이씨가 258명, 영천이씨가 243명, 우계이씨가 190명, 광주이씨가 151명, 전의이씨가 129명, 진성이씨가 119명 순이다.

시조 표암공(瓢巖公) 이알평(李謁平)은 박혁거세 탄생설화에 나오는 초기 신라의 6촌 중 알천 양산촌(閼川 楊山村 : 급량부)의 촌장이다.
이알평은 신라의 좌명공신(左命功臣)으로 「경주이씨대종보」에 의하면 박혁거세가 왕이 된뒤 아찬(阿粲)에 올라 군사업무를 장악 했으며 32년(신라 유리왕 9년)에 양산촌 이씨로 성을 하사 받았다고 한다.

신라 법흥왕 23년 익호(謚號)를 문선공(文宣公)으로 하였고, 무열왕 3년 은열왕(恩烈王)으로 추봉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후의 후손에 대한 계대가 전해지지 않아 이알평의 36세손이며 신라 때 소판(蘇判) 벼슬을 지낸 진골(眞骨) 출신인 이거명(李居明)을 1세조로 하고 있다.

중시조 이거명의 17~21세손에서 -평리공파(評理公派)-이암공파(怡庵公派)-익재공파(益齋公派)-호군공파(護軍公派)-국당공파(菊堂公派)-부정공파(副正公派)-상서공파(尙書公派)-사인공파(舍人公派)-판전공파(判典公派)-월성군파(月城君派)-직장공파(直長公派)-석탄공파(石灘公派)-진사공파(進士公派)-교감공파(校勘公派) 등 14파로 크게 나뉘고 다시 아래로 내려오면서 크고 작은 70여개 파로 분파된다.

전국적으로 유명한 집성촌은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망호리. 해안을 낀 이곳 야산 아래 경주이씨가 자리를 잡은 것은 400여년 전이다. 익재공 이제현(益齋公 李齊賢)의 9대손인 호암공 이반기(湖巖公 李磻琦)가 정미사화(丁未史禍)를 피해 경기도 고양에서 이곳으로 터를 옮겼다. 현재 약 100여가구가 살고있다.

경주이씨는 고려 말에 크게 세력을 떨쳤고 조선에 들어와서도 문과 급제자 178명, 상신 8명, 대제학 3명을 비롯하여 10여 명의 공신과 많은 학자와 명신을 배출하였다.8대파 중 상서공파의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집안에서 가장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고, 세칭 8별(鼈) 집으로 불리우는 익재공파와 이완(李浣) 대장을 낳은 국당공파가 그에 버금간다.

경주이씨가 조선에 배출한 상신·문형 가운데 백사집에서 영의정 4명, 좌의정 2명, 대제학 2명이 나왔고, 8별집에서 좌의정과 대제학 각 1명, 국당공파 중의 정순공(靖順公) 이성중(李誠中) 후손에서 좌의정 1명이 나와 이들 3파가 사실상 경주이씨의 주축을 이루었다.

고려말의 대학자이자 외교가, 문장가, 충신이기도 했던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1287~1367)이 고려 때의 경주 이씨를 대표한다. 이제현은 충선왕부터 공민왕까지 다섯 임금을 섬기며 여러 방면에 공적을 남겼고 문장가였을 뿐만 아니라 탁월한 외교가였다.

그가 중국에 머물 때 원나라의 화가 진감여(陳鑑如)가 그린 익재의 영정은 오늘날 고려시대의 희소한 유품으로 남아 있는데 원나라 때의 화풍을 전하는 중요자료로서 국보 제110 호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8형제가 모두 문장에 뛰어나 8문장으로 꼽히는 박팽년의 사위인 이공린(李公麟)의 아들들과 임진왜란이 터지자 유성룡을 도와 병참 책임을 맡는 등 큰 활약을 한 이시발(李時發)을 비롯하여, 오성과 한음의 일화로 유명한 오성대감 이항복은 임진왜란 때 5차례나 병조판서를 역임하여 국난을 수습, 전후 정승에 올라 당쟁 을 막는데 힘쓴 조선시대 4대 명재상의 한 사람으로 청백리에 올랐다.

국당공파의 또 하나의 역사적인 인물은 병자호란 뒤 효종의 명을 받은 송시열과 함께북벌을 계획했던 이완(李浣)대장이다. 벼슬이 좌의정에 오르니 군인으로서 재상에 오른 사람은 조선조를 통틀어 단 7명뿐.
그리고 인조 때 이괄의 난 진압군 부원수로서 후세에 이름을 떨쳤던 이완대장의 아버지 충무공 이수일(李守一), 효종 때 학문과 인품이 뛰어나 좌의정에 올랐던 문익공 이경억(李慶億) 등 경주이씨의 역사적 인물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근대 인물로는 고종이 보냈던 헤이그밀사였던 이상설(李相卨)과 28세에 평안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李始榮)과 재계의 거목이었던 삼성그룹의 이병철(李秉喆)회장이 있다. 현대의 인물로는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이종찬씨와, 민정당의 원내총무를 맡았던 이시영의 종손 이종찬씨와 전 신민당 부총재 이민우씨 등이 있다.

울진에는 판서를 지냈던 국당공파 이 길(李 吉)이 조선 단종 3년(1445년)에 중앙의 권력다툼을 피해 한양으로부터 평해군 기성으로 입향하였고, 입향조 묘소는 온정면 외선미리에 있다.
학문과 명망이 높았던 입향조의 7세 손 선계공(仙溪公) 망룡(望龍)은 세 아들을 두었는데, 이들 삼형제가 울진의 경주이씨 3파를 이루었다.

이후 35명의 분파조가 뒤이어 입향하여 김해김씨 입향조 38명에 버금가고 있다. 울진에 집성촌으로는 온정면 외선미리, 소태3리(하암), 금천2리(입암), 나마실이었으며, 평해읍 삼달리에도 집성촌이 있었다.

후손 중에는 울진에서는 가장 먼저 독단적으로 4월5일 (4월 11일 매화 만세, 13일 흥부만세) 온정면 일경주재소에 인접하여 기미독립만세를 부르다 체포되어 부산형무소에서 10월의 옥고를 치러 나중에 대한민국 건국포장을 받은 삼사(三事) 이화익(李和翊)이 있었다.

또한 그의 형으로서 39세에 평해군 향장(鄕長, 오늘날 향교 典敎)을 지냈던 죽헌(竹軒) 이목익(李穆翊)은 을사조약의 체결을 탄식해 오다 기미만세사건 이후 일본 물품 배척포고문을 일경주재소 벽 등에 게시하였다가 체포되어 부산형무소에서 6개월 간 옥고를 치르고 나와 고종황제가 서거하자, 해방될 때까지 흰 갓을 쓰고 벗지 않아 백립옹이라 불렸으며, 후에 건국훈장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이에 1977년 울진의 애국지사 전영경과 삼율의 김병두가 나서 성금을 모아 현재 온정면 구 온정초등학교 아래에다 두 분의 넋을 기리는 비각을 세웠다.

죽헌의 증손이자, 이 길(李 吉)의 입향 오백년의 종가 21대 종손인 이영호(75세, 전직 온정농협장) 옹이 온정면 하암 마을에서 종택을 지키며, 조상들의 불굴의 충의정신을 후예들에게 전파하고 있다.

연락처 중앙종친회 : 02) 742-6250 울진종친회:788-2288, 787-3309
 

                                                      /전병식 편집국장


입력 : 2005년 02월 25일 14: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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